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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다.

by 부끄럽지 않게

아버지는 기능직 공무원,

어머니는 급식실 조리원이셨다.

비록 살림살이가 넉넉하진 않았지만,

아껴 살면 4식구가 살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생각보다 공부를 잘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교 평준화가 진행되었지만,

내가 살던 지역은 여전히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운 좋게 나는 지역 최상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운 좋게도

고3 때 내 모의고사 성적은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해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이었다.

1교시 언어 영역 시험 후 화장실에서 우는 친구도 있었고,

2교시 수리 영역 시험 후 다 포기하고 집에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절망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재수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기에

흘러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 끝까지 시험을 봤다.

집에서 가채점을 하고,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평소 모의고사 점수보다 30점 가까이 떨어졌다.

언론에선 불수능이라고 하지만,

내 점수가 어느 정도 위치일지 정확히 가늠되지 않았다.

그날 밤,

다들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안도하는 꿈과

나만 망해버린 결과에 좌절하는 꿈을 번갈아 가며 꿨다.

밤새 온 몸에 식은 땀이 계속 흘렀다.


정말 다행이었다.

모의고사에 비해 점수는 30점 가까이 떨어졌지만,

백분위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대학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 왔다.


정시 원서 접수를 앞둔 주말이었다.

부모님께서 집 인근에 국립대학교에 지원해보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하셨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있는 내게,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너를 서울에 있는 사립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된다고 이야기 하셨다.


"이럴 거, 왜 진작 말씀 안하셨어요.

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너는 결국 그 대학 가야 한다고 왜 미리 말씀 안하셨냐고요.

왜 공부했어요 저.

겨우 그딴 대학 가려고 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거예요


지금까지 뭐 하셨어요.

자식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낼 돈도 마련 못하시고 지금까지 뭐하셨나고요"


너무 속상한 마음에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울부짖으며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곤 그대로 집을 뛰쳐 나갔다.

온통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속상함 뿐이었다.


부모님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두 분이 출근하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두 분이 잠드신 후에야 집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자리에 누워 두 분이 출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들어 오셨다.

모른 척 누워 있는 내게,

아버지는 듣는 이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우리 아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결과 얻었는데,

아빠, 엄마가 지원 못해줘서 미안해.

아빠도, 엄마도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아빠, 엄마가 부족한 게 많아서

우리 아들 마음에 상처 줬어.


아빠, 엄마 할아버지한테 하나도 물려 받은 거 없이,

너희 잘 키우고 싶어서 너희 어릴 때 엄마는 밤밤늦게까지 베 짜는 일 하고,

아빠도 교통비라도 조금 아끼려고 걷기도 하고 겨울에도 시내까지 오토바이 타고 왕복하고 했었어.

......"


아버지는 나가셨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너무 울어 가슴이 미어지고, 먹먹해지면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누린 많은 것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 위에 있음을,

세상엔 당연한 게 없음을 바보처럼 그제야 깨달았다.



철없이 부모님께 드린 상처,

평생을 두고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자식,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S-IiArGm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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