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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듯한데 슬픈 하루

by 부끄럽지 않게

한 아이가 24학년도 언어와 매체 학교 시험 문제를 갖고 있었다.

졸업한 선배에게 받은 시험지라고 했다.

얼마 전 수업 중에 혹시 풀이해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딱히 떠오르는 이유는 없는데,

선뜻 '그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학교 내신시험 기출문제라고 하니,

조심스러웠다.


잠깐의 고민 후

'그래, 어차피 학교에서도 시험 문제 공개하는데

풀이해줘도 괜찮겠지.

그리고 아이 몰라.

안그래도 언매 어려워 하는데

설명해주면 방학 동안 더 공부 알차게 할 수 있겠지.

눈치 그만 볼래'

하는 마음이 들어 수업 시간에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

모두 동의한다면 풀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내신 문제를 풀어주며,

이 문제는 선생님이 어떤 의도로 낸 문제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다행히

아이들도 남은 방학 기간 동안

언어와 매체 과목을 어떻게 준비하면 효과적일지 감을 잡은 눈치였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수업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아내가 이야기했다.


"오, 이제 떠난다고 거침이 없는데?"

"응, 사실 내년에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설명 못했을 것 같아.

조심스럽고 눈치 보여서.."


방과후 수업을 진행하는 목적은

사교육 비중을 줄이고,

교육비 지출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래서 작년 겨울 방학 때,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2학년 1학기 때 배울 문학 교과서의 내용을 수업했었는데

2월 달,

수업 계획을 수립하며 난리가 났었다.

그렇게 방학 때 다 수업해줘 버리면,

수업 때 가르치기 어렵고,

시험 문제 내기도 어렵다는 이유였다.


'떠난다고 거침없다'는

아내의 말이 불현듯 슬펐다.

어느 직장이나 그럴 수 있겠지만,

주객이 전도된 느낌.


목적보다는 자기 편의가 더 중요해지고,

관계를 위해 더 잘할 수 있음에도

적정선에서 목적 달성을 조절하는 느낌.


이런 생각이 누군가에겐

조직과 전체를 신경쓰지 않는

이기적인 행태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정말 환멸감까지 밀려 왔다.


아이들은 공부할 양이 많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서

비싼 학원을 찾아 다니며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데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음에도

조심스러워 도움을 망설여야 하는 상황.


오늘은 뿌듯한데,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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