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직 오지 않은 문장의 계절
요즘은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훨씬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예전에는 문장이 먼저 나에게로 왔고 생각은 그 뒤를 따랐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순서가 어느새 뒤집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여러 갈래로 뻗어 있지만 그것들이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가까운 곳에서 맴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듯, 막상 붙잡으려고 하면 조금씩 물러난다. 분명 내 안에서 나왔어도 아직은 나의 것이 아닌 문장으로 느껴진다.
화면에는 빈 문서가 열려 있다. 커서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인다. 나는 그 깜빡임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한 줄을 쓴다. 쓰고 나서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다. 틀린 문장은 아니다. 문법적으로 어색한 것도 없고 말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커서를 다시 그 앞으로 끌어오고, 몇 글자를 고치고, 고치다가 멈추고, 결국에는 지운다. 지우고 나면 화면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진다. 방금까지 분명히 있었던 흔적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왜 나는 괜찮은 것조차 끝내 남겨두지 못하는 걸까.
일단 써놓고 나중에 고치자는 방식으로도 바꿔봤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마음과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아직 한 줄도 채 되지 않은 문장 위에 함께 얹힌다. 그 두 가지가 겹치는 순간 글은 무거워진다. 문장은 더 이상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춘다. 나의 진심이 담기면 이상하게도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 조심스러움이 결국 한 발짝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쓰지 못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손은 키보드 위에 얹혀 있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에는 오후의 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그 빛이 책상 위에 얇게 깔리는 걸 오래 바라보았다. 빛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이동했다. 그 느린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창으로 들어오는 각도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걸, 큰 창 가까이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다.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달력보다 빛이 먼저 알려주고 있었다. 빛은 제 때를 알고 있으니까.
문득 글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오지 않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일지도. 억지로 꺼내면 제 빛을 잃는 것들이 있다. 내가 지운 문장들도 어쩌면 그랬을 거다. 어설프게 붙잡아 두기보다, 한 번 놓아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자기 계절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쌓이지 않는 시간을 낭비처럼 여겼는데, 조금은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그때는 형태를 갖추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 날 불쑥 문장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지운다. 여전히 망설이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오래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것들이 제 계절을 찾아올 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