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금 준비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이제 3월에 들어선 덕일까. 요즘 날씨는 꽤 따스하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물을 끓이고 컵에 커피 가루를 넣었다. 그 위에 물을 따르고 식탁 겸 책상 위를 가볍게 정리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오늘은 꼭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속에 오래 담아 두기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 일은 특별히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당장 시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놓여 있는 일이었달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커피를 만들어 놓고 앉은 나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잠깐 다른 일을 먼저 하고 시작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하루는 길었다. 시간도 충분해 보였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은 지나갔다.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그 일을 시작하지 않은 채였다.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머리가 조금 정리될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별 의미 없는 영상 하나를 틀어 두었다.
그러는 사이 창밖의 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낮의 밝음이 서서히 기울어 가며 오후의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저녁이 되어 햇빛이 더 이상 방 안에 머물지 않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 일을 시작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작은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은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피곤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머릿속에서는 종일 같은 생각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해야 할까. 지금 해도 괜찮을까. 조금 더 준비한 뒤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질문들은 작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쉽게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을 떠올리자마자 바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저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으면 첫 발을 내딛지 못한 채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장면이 한 번씩 지나간다. 시작하는 순간도, 그 과정도, 심지어 실패한 뒤의 모습까지도 미리 상상해 본다. 그렇게 여러 번 생각을 굴리다 보면 오히려 몸은 더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망설임이라고 부른다. 실행력이 부족한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나는 그 시간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문득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실행되지만, 어떤 프로그램은 화면 한가운데 작은 동그라미가 돌며 잠시 로딩 화면을 보여 준다. 그 시간 동안 노트북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작업을 정리하고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 멈춰있다. 어떤 날에는 하루가 지나도록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마다 시작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생각의 속도도 서로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떠오른 순간 바로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오래 생각을 굴린 뒤에야 걸음을 내딛는다. 그 차이가 꼭 더 낫거나 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아마 내일도, 나는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다.
바로 로딩병이다.
나처럼 이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라면, 당신에게도 언젠가 시작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