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채로 오늘을 건너는 법

2. 끝까지 가지 못해도 남는 것들

by 잔잔

작심삼일. 마음먹은 일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그 말과 가까이 지내왔다. 사흘은 아니어도 내 다짐들은 늘 짧은 계절을 산다. 다짐의 시작에는 또렷해 보였던 것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흐릿해졌다. 그것은 그때의 마음이 단단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쉽게 싫증을 내는 변덕쟁이일지도 모르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어느 날 조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았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선율이 작은 손끝에서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나 역시 그 나이에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곡을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던 엄마의 마음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엄마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농담처럼 말한다. 그때 돈만 버렸다고. 몇 년의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지만 내 실력은 그만큼 자라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돈인지도 알지 못했다. 조카의 피아노 실력에 감탄하는 나를 보더니, 엄마는 내 자취방에도 피아노 하나를 들여놓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나는 피아노를 주문했고, 지금 내 컴퓨터 책상 옆에는 그 피아노가 조용히 놓여 있다. 처음 피아노가 배송 왔을 때는 들뜬 마음으로 악보를 펼쳐 계이름을 따라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제는 그저 관상용처럼 놓여 있을 뿐이다. 아마 먼지가 여기저기 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더니 이제는 피아노 산 돈이 아깝다고 말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우스갯소리가 늘어났다.

나에게 일본어 공부도 비슷하다. 나는 히라가나를 외우고 다시 가타카나를 적어 내려가다가 늘 나행에서 멈춘다.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몇 해에 걸쳐 되풀이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히라가나를 외운다. 그리고 또 나행에서 멈춘다. 이 정도면 나행의 저주다. 벗어날 수가 없다. 나행까지 도달할 즈음이면 이미 일본어에 대한 흥미는 식어 있다.

이렇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애매모호한 실력이 된다. 그래서 늘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남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애매모호함 속에서도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지브리 영화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제법 완곡으로 연주할 수 있고, 이루마의 곡도 쉬운 악보라면 연습해서 피아노를 칠 정도는 된다. 일본어도 나행까지는 글자를 보면 쉽게 읽고 쓸 수 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웠기 때문이다.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무엇이라도 되었다. 되어주었다. 그것이 소박한 것일지라도.

요즘 나는 일기를 쓴다. 일기는 초등학생 때 숙제로 쓰던 일을 제외하면 제대로 써본 적이 거의 없다. 다이어리를 사던 해도 몇 번 있었지만, 앞의 몇 장만 채우고 전부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모른다. 내 방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 블랙홀이 있는 게 분명하다. 찾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물건들도, 내 다이어리도 전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올해는 노란 금붕어가 그려진 다이어리를 샀다. 그림이 귀여웠고, 금붕어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1월 1일, 새 페이지를 열었다. 며칠은 제법 성실했다. 글씨 옆에 스티커를 붙이며 혼자 흐뭇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에 감기 몸살이 찾아왔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 며칠을 비워두고 나니 비어 있는 날짜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쓰지 못한 사실이 오히려 더 쓰기 싫게 만들었다. 이대로 두면 이 다이어리 역시 사라질 것 같았다. 매번 이렇게 싫어진 마음으로 뭐든 다 놓아버리면 결국 나의 블랙홀에 쏙 하고 빨려 들어가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고 빈칸 위에 글자를 크게 적었다.

'감기 몸살로 아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다시 써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루틴이 되지 않은 일은 시작보다 유지가 더 어렵다.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어쩌면 계속 작심삼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멈추었다가도 다시 펼치면 된다. 내 다이어리에 그려진 금붕어처럼, 모든 것을 잊고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끈기가 없다고 주눅 들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또 내년에 다이어리를 사서 일기를 쓰면 된다. 그렇게 나는 적어도 1월에 있었던 일들은 전부 일기에 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충분히 멋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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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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