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우리 삿포로에 갈까요, 낭만씨를 만나러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얼음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예요. 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나는 그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다녀온 사람처럼 마음이 젖어 있었다. 책의 제목은 시집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여행 산문집이다. 그 안에 담긴 삿포로는 눈으로 덮인 도시였고, 고립과 사랑이 동시에 가능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나는 삿포로의 겨울을 오래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매년 겨울이면 방 안에 러브레터를 틀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화면 속 여자 주인공과 바닥에 깔린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다. 나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눈 속에 파묻히고 싶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 고립조차 괜찮겠다고. 아니 오히려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눈이 내리는 도시를 사랑의 형태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처음으로 훗카이도에 갔다. 오래 간직해 온 장면을 실제로 마주하러 가는 길이었다.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고 빠르게 수속을 밟았지만, 비행기는 계속 지연되었다. 윈드시어 때문이었다. 이미 탑승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나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분주하게 오가는 발걸음들 사이에서,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고, 지연된 비행이 겨우 출발했다.
부푼 마음은 신치토세 공항에서부터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삿포로에 와 있다니. 나의 오랜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땅과 공기까지도, 나에게는 단순한 여행지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은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이 몇 번의 오류 끝에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다. 아무리 눌러도 다시 켜지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국제적 미아가 되었다. 이미 연착으로 예민해져 있던 상태라 당황스러움은 더 크게 올라왔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깐 서 있었다.
한국에서 삿포로역 근처의 스프카레집을 예약해 둔 상태였다. 가게에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을 해야 했고, 가족들에게도 삿포로에 잘 도착했다고 알려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그아웃된 채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사진을 찍으려는 용도로 공기계 하나를 챙겨 왔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행이 정말 끔찍했을지도 모른다.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녔고, 가까스로 연결이 되었을 때 그제야 잘 도착했다고 가족들에게 몇 마디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스프카레집에는 결국 지각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예약 시간은 지나 있었지만, 다행히 가게 안은 한산했다. 따뜻한 공기와 스프의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렇게 나의 첫 삿포로가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상상했던 방식으로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기대하고 왔는데, 그곳에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거리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젖은 도로 위로 불빛이 번졌고, 간판의 색들은 물 위에서 흐트러졌다. 내가 상상했던 새하얀 풍경 대신, 젖은 색들이 겹쳐져 있었다. 발자국 대신 물웅덩이가 첨벙거렸다.
아마 인생이란, 자신이 오래 품어 온 장면을 실제로 마주할 때 그 장면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형태로든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애초에 기대라는 게 그런 것처럼.
여행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좋았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덜했고, 나는 삿포로에 대한 환상을 그곳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낭만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집 앞 사진관에 들렀다. 필름카메라를 맡기고 스캔된 사진을 메일로 받았을 때, 몇몇 일본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삿포로에 살다가 이번에 도쿄로 이사 간 친구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내가 숙소로 머물던 가정집 앞에 지하철역 하나가 있었는데, 그 옆에서 자신이 살았었다고. 계속 이동하느라 눈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아사부역.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그 장소가 갑자기 묘하게 따뜻해졌다.
아마 낭만이라는 건 꼭 눈처럼 쌓이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