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힘든 질문이
'오늘 메뉴는 뭘로 하래?' 거든.
근데 어떤 차를 마시고 싶냐니... 최악의 고문이야"
단지 뭘 먹고 싶은지 물었을 뿐인데
고문이라니,
이 남자 엄살도 과장도 심하네.
"좋아. 그럼 오늘은 어떤 향기에 끌려?"
"그건 난이도 최상급이지.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는 놈한테, 향기????"
이쪽으로는 구제불능인 건가, 이 남자…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꽃향기냐, 과일향기냐, 풀향기나, 혹은 흙향기냐.
뭐 그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잖아.
객관식이면 좀 나은가?"
그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표정이다.
"안 되겠다. 역시 아무거나 줘"
사실 아무거나란, 전부 다나 마찬가지다.
진짜 맥 빠지는 말.
"넌 입에서 어떤 냄새가 나든 상관없단 말이야?
청국장 냄새든, 썩은 고기 냄새든"
"(눈 동그랗게 뜨며) 그런 냄새가 나는 차도 있어???"
바본가??
놀리는 건가??
저 천진한 표정으로??
아님, 선택 따윈 아무래도 귀찮으니 오롯이 나에게 맡기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난,
너란 남자의 취향이 궁금하단 말이다!!
모름지기 세상에 취향 없는 놈은 없다.
그저 아직 모를 뿐.
좋아. 오늘 네 취향을 찾아보자. 최영진!
나는 먼저 은은한 풀향기와 고소함이 느껴지는 우전을 꺼낸다.
그리고 달콤한 밀향, 새콤한 과일향이 나는 동방미인을.
또 깊고 묵직한 탄배향과 꽃향기가 조화를 이룬 대홍포를,
마지막으로 숲에서 습기 머금은 낙엽을 한 줌 퍼올린 듯, 흙내음이 나는 보이숙차를 꺼내왔다.
신기한 듯 내가 차를 꺼내고, 덜어내는 모습을 구경하는 너.
"진짜 차 좋아하나 보다. 무슨 차가 이렇게 많아? 이게 다 다른 차야?"
무슨 소리.
난 아직 초보라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닌걸.
"자, 하나씩 냄새를 맡고 찻잎을 관찰해 봐. 모두 다 제각각이지?"
"흠… 뭔가 약간, 식물 연구소에 온 기분이기도"
그러더니 진중하게,
하나씩 하나씩
차가 담긴 다하를 집어 올려 냄새도 맡고,
찻잎을 들어 올려 뚫어져라 들여다보기도 하고,
기특하게도 핸드폰으로 사진까지 찍어보는 너란 남자.
"갑자기? 웬 열공?“
"(내 눈을 보고 씩 웃더니) 난 니 말 잘 듣잖아"
헙.
왜 저러는 거지?
이건 무슨 뜻이라는 거지?
저 미소는?
난 웃고 싶은데,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니
어쩐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다.
"그래? 그랬…었나? 어… 그랬구나"
중언부언 중언부언...
마침 물이 끓는다.
침착하자. 침착.
이번에는 정말, 진짜로,
잘, 제대로 내려보자고.
먼저 끓는 물을 빈 다호에 따르고,
유리 숙우에도 따른다.
천천히 다호를 돌려 용기를 데운 후 물은 퇴수기에 따라버린다.
이제 차시를 들고
다하에 담아 놓았던 우전 찻잎을 다호 안에 넣는다.
유리 숙우에서 잠시 식혀둔 물을
조심스럽게 다호에 따른다.
자 이제 뚜껑을 덮고... 기다려야지...
오늘은 숫자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거야.
대신 차분하게 숨을 쉬며, 조용히 투명한 다호 안에 보이는 찻잎을 바라보고 있어야지.
어쩐지 오늘은 너도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나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러니 나도 말이 없다.
네가 나를 바라보는데도, 우러나는 차를 보고 있으니 마음은 편안해진다.
우리 둘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다호 안의 찻잎의 움직임을...
천천히 찻잎이 움직이고,
물의 빛깔이 변하는 모습을...
"자. 이제 내려볼게"
나는 연하디 연한 연둣빛이 비칠 무렵,
찻물을 유리 숙우에 옮긴다.
그 순간, 향긋한 꽃향기가 코를 찌른다.
예감이 좋다.
너의 잔을 채우고
나의 잔도 채우고.
"자, 우전이라고 해. 마셔봐"
"(찻잔을 보더니) 오! 우전, 반가워. 난 영민이라고 해"
풉.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
너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
네가 호로록. 한 모금.
나도 호로록. 한 모금.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본다.
"왜?"
나는 혹시 몰라 놀란다.
"이상해?"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맛이 있을 수가 있어?"
"뭐가?"
"진짜 맛있어. 진짜 향긋해. 이건... 이건... "
"아... 그래?"
"이런 차를 알고 있다니.
김유리, 너 진짜 근사한 사람이야."
성공...
나 오늘 성공했다.
그래 오늘 너의 취향을 같이 찾아보자.
그리고 영진아.
나도 우전을 참 좋아해.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