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지분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캡틴 아메리카:시빌워>의 두 번째 예고편엔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거미가 나오죠. 마블 스튜디오와 소니픽쳐스가 합의함에 따라 마침내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소니가 워낙 까다롭게 굴기도 하고, 스파이더맨의 비중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어 혹시 카메오 정도로 다뤄지는 건 아닐까 염려도 되네요. ‘코믹북닷컴’에 따르면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연기할 톰 홀랜드가 애틀랜타에 이어 베를린 촬영장에서도 일단 모습을 보이긴 했습니다.
부디 이 거미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거든요.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스파이더맨은 서민적 인간미가 있어서 좋아요. 그냥 열심히 사는 옆집 거미형 같은 느낌이랄까요.
판권이 꼬이는 바람에 스파이더맨 영화는 무려 다섯 편이나 만들어졌는데요. 그중에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2>를 저는 제일 좋아합니다. 샘 레이미 특유의 컬트적 익살이 섞인 독특한 색채의 히어로 무비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엔 ‘우리 안의 영웅’에 대한 철학이 있습니다.
<스파이더맨 2>는 히어로 무비 말고 드라마로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영화는 스파이더맨이 피자 배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됩니다. 생활고 탓에 스파이더맨 셀카를 찍어 신문사에 팔기도 하죠. 급기야는 대출을 받기 위해 할머니와 은행에 가는 전무후무한 히어로가 되기도 합니다.
가면을 벗은 피터 파커는 다른 히어로들처럼 억만장자나 희대의 천재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입니다. 책임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맨날 사람들 구하러 다니느라 좋아하는 여자한테 차이기 직전이고, 학교에선 제적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설상가상 오랜 친구와도 사이가 멀어지네요. 이 모든 게 다 그놈의 스파이더맨이라는 책임 때문입니다.
결국, 피터 파커는 내려놓아 버립니다.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버리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죠. 그리고 잠깐이나마 남들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삶에서 안락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오래갈 순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죠. 피터 파커는 곧 추슬러 일어섭니다. 구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다시 거미줄을 타고 도시 위를 유영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때부터 관객의 예상을 깨는 놀라운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늘 히어로에게 구원돼야 할 존재로만 여겨지던 평범한 시민들이 오히려 스파이더맨을 구하는 장면이죠. 바로 여기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시민들은 여느 히어로 무비에서와같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급급한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영화는 오히려 이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라고 얘기합니다. 감독은 메리 할머니의 입을 통해 이 생각을 대사로 풀어냅니다.
“모두 영웅을 사랑하지. 영웅을 위해 모여들고, 영웅의 이름을 환호해.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잠깐이라도 그 영웅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빗속에 서 있던 걸 추억하게 될 거야.
하지만 영웅은 우리 안에도 있단다. 우릴 정직하게 하고, 힘을 주고, 고귀하게 만들며, 죽는 순간 부끄럽지 않게 해주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는 영화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악당에게 납치당한 할머니는 우산으로 악당을 패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하죠. 메리 제인 역시 부들부들 떨면서도 스파이더맨을 도우려고 바닥에 떨어진 각목을 주워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히어로에게 모든 책임을 맡긴 채 그저 무력하기만 한 여느 영화들과는 다르죠.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전철 혈투 시퀀스입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스파이더맨과 싸우던 닥터 옥토퍼스는 열차의 브레이크를 박살 내버립니다. 가방끈 긴 빌런답게 힘쓰지 않고도 제압할 전략을 생각해낸 것이죠. 스파이더맨은 반드시 시민들이 타고 있는 이 열차를 멈추고자 온 힘을 다할 테니까요.
사람들을 구하던 중 그만 마스크에 불이 붙고, 스파이더맨은 깜짝 놀라 마스크를 벗습니다. 그리고 가면을 벗은 그 ‘피터 파커의 얼굴로’ 열차를 멈춰 사람들을 구합니다. 전속력으로 폭주하는 거대한 열차를 멈추는 데 온 힘을 소진한 그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맙니다. 선로 아래로 추락하려는 그때, 사람들이 저마다 열차 밖으로 손을 뻗어 그를 구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스파이더맨 가슴에 그려진 거미 문양을 클로즈업합니다. 히어로의 상징을 손들이 하나둘씩 감싸안습니다. 열차 칸의 사람들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기절한 스파이더맨을 안전한 곳으로 옮깁니다. 흑인의 손, 백인의 손, 매니큐어를 칠한 손, 가정주부의 손, 아이의 손, 직장인의 손… 카메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 손들을 차례로 비춥니다. 손들은 스파이더맨을 안전히 눕힙니다. 그리고 가면이 없는 그를 보며 말하죠.
“He is… just a kid.”
스파이더맨을 해치려는 닥터 옥토퍼스 앞에서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겁이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날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라며 막아서죠. 메리 할머니가 얘기한 ‘우리 안의 영웅’이 나타난 순간입니다. 우릴 정직하게 하고, 힘을 주고, 고귀하게 만들며, 죽는 순간 부끄럽지 않게 해주는.
이것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도 히어로 같이 멋진 모습을 꿈꾸며 사업을 시작하지만, 현실에 치이다 보면 누구에게나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죠. 다 내려놓고 남들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싶은 마음이 옵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우리 스타트업의 구성원들뿐입니다. 한명 한명 내미는 그 손의 온기만이 우릴 구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영웅적인 사업가 한 명이 아닌, 공동체를 이룬 구성원 한명 한명의 손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큰 지분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모두가 피터 파커처럼 사실은 겁 많은 그냥 보통 사람이래두요.
- 원문보기 : 스타트업 관람가 5. <스파이더맨>과 평범한 우리 안의 영웅 from 비석세스
이미지 출처: Columbia Pictures Industries,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