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Pick #103
1. 규제 샌드박스라는 이름은 모래 놀이터에서 왔습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실험하라는 뜻이죠. 2016년 영국에서 시작해 현재 60여 개국이 운영 중인 이 제도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스타트업이 규제 리스크를 감수하고 새로운 시장을 실증하면, 성공 시 정식 사업권으로 전환해준다는 약속.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불거진 STO 장외거래소 인가 논란은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모래성을 쌓은 아이와 그 성을 가져가는 어른이 다르다면, 누가 다음에 모래놀이터에 들어가려 할까요.
2. 지난 12일,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운영하는 루센트블록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18년 창업 후 7년간 규제 샌드박스 안에서 50만 명의 이용자와 300억 원 규모의 자산을 발행·유통하며 시장을 개척해왔는데, 정작 제도화 단계에서 탈락 위기에 놓였다는 겁니다. 금융위원회가 장외거래소 사업자를 최대 2곳만 선정하기로 한 가운데, 증권선물위원회 심의 결과 한국거래소-코스콤 컨소시엄과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이 유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전자에는 20여 개 증권사가, 후자에는 34개 증권사와 금융지주가 참여합니다.
3.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에도 거래대금 기준 조각투자 업계 1위 뮤직카우를 비롯한 조각투자 기업 4곳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구도를 단순히 '스타트업 vs 기득권'으로만 볼 수 없다는 이들의 반론도 일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외거래소는 매매와 유통을 담당하는 2차 시장 인프라입니다. 시장 감시, 이상 거래 탐지, 결제 안정성 등 투자자 보호를 위해 검증된 금융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논리죠. 루센트블록이 실증한 발행시장과 지금 인가하려는 유통시장은 리스크 관리 체계가 다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4. 그럼에도 찜찜함이 남는 건 구조 때문입니다. 규제 샌드박스 승인 기업 중 72%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입니다. 이들은 자본과 인프라가 부족한 대신 규제 리스크를 온몸으로 떠안으며 시장의 가능성을 검증합니다. 그런데 2019년 승인받은 195개 사업 중 절반이 중단됐거나 중단 위기에 처했습니다. 샌드박스 1호 기업 차지인은 지난해 회생절차를 신청했고, 버스 LED 광고판 사업자 제이지인더스트리는 까다로운 조건에 수익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폐업했습니다. 실험은 스타트업이 하고, 검증된 시장에는 자본을 가진 쪽이 들어오는 패턴이 반복된다면, 이 제도는 혁신의 마중물이 아니라 대기업의 시장조사 대행에 그칠 수 있습니다.
5. 이번 논란 후 금융위는 14일 정례회의에서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도화 지연으로 STO 시장 전체가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주든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진짜 문제는 특정 기업의 당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입니다. 샌드박스에서 실증한 성과가 제도화 심사에서 얼마나 반영되어야 하는지, 기존 인프라 보유와 실증 경험 사이의 가중치를 어떻게 둘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모래놀이터에서의 규칙조차 불분명하다면, 다음 혁신 산업에서 누가 먼저 삽을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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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The Gleaners),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