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매거진> 카툰 작업 후기
그림을 그린다.
항상 내키는 대로 그리지만, 의뢰를 받으면 다르다.
제안을 계속 생각한다. 그 제안을 줬던 사람과 환경을 생각하고, 그림이 실릴 매체를 생각한다. 말이 없는 깊은 대화 끝에 그린다. (지난번 - PD수첩 일러스트에서 말 없는 대화를 푸니 막 2화로 남고요)
이번 의뢰는 좀 달랐다. 내 생각을 묻고 있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0777044
일.
내게 그토록 당연하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나는 주어진 땅을 잃는 이름이었다.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
10년 전 입사했던 그 날 나에게도 했던 질문이고, 지금도 끊임없이 하는 질문인데 여기에 "여자"라는 정체성이 붙으면 이야기는 다른 시절로 간다.
왜 일 해야 하는가, 결혼하면 혹은 아이 낳으면 다 그만둘 일이라고 일의 무게를 폄하한다. 그 모든 관문을 넘어서도 일을 하고 있으며 다시 그 정체성으로 폄하된다. 이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바뀐 것은 큰 소리로 낄낄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느냐, 짐짓 애엄마가 그렇지 하고 마음으로 생각만 하느냐 차이다.
이 카툰을 그리기 위해 '일'을 다른 자세로 바꿔 앉아 바라보았다.
나에게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 일이 만들어 낸 것은 어떤 걸까. 스타트업들이 본인들 제품을 평가받는 개념 중 PMF(Product-market fit)라는 게 있는데, 시장에서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사용해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는 거다. 한 마디로 그것이 유용한가를 보는 건데 - 확인하는 질문 중에 이런 게 있다.
How would you feel if you could no longer use [ ]?
나에게 이 괄호 안에 '일'을 넣어서 질문했다.
더 이상 내가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해에 그 프로젝트를 하지 못했다면 그런 행사를 하지 못했다면 그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면. 수많은 가정법을 지우고 나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일" 하나만으로 "나"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를 세상 위에 들어 올려놓는 가장 큰 지렛대라는 사실에서 굳이 도망칠 필요가 있을까. 일이라는 무게에 납작해지는 날도 있고, 혹은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날도 있지만 나는 10년째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일을 일답게 만드는 것은 일하지 않을 때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꽃을 잡고, 매일 몸을 단련시키는 사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쩌면 당연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회사에서 일하는 나만큼 중요하다.
부서질 것 같을 때에도 한자 읽고 쓰는 일이 나를 살렸고, 바보같이 힘 빠지는 날에도 아무렇게나 그려된 그림 한 장이 숨구멍을 열었다.
이 일을 모두 할 수 없다. 나는 회사원이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나'들은 평행우주 위에 각기 그들로 존재하고 이들을 하나의 조각이 되어 내가 된다.
모름지기 '한국 여자'라면 저울 위에 끌려 올라갈 때가 있다. 어쩌면 의식은 못한 채 매일 이 저울 저 저울을 뜀뛰기 하는지도 모르겠다. 외모와 학벌이 저울질되기도 하고, 똑같은 나인데 20대의 나와 30대의 내가, 혹은 미혼의 나와 기혼의 내가 양쪽 저울에 올려질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종종 저울에 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측정할 수 없는 고유의 것들이 쉽게 폄하되었다.
"회사 그만두고 꽃집 하면 되겠네"
"애 키우면서 하기에는 좋지"
"왜 회사 다녀"
직접적으로 저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에둘러서 말하거나 혹은 다정함으로 치장하고 저울질을 했다.
나는 복합적인 사람이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각자의 가치로 나를 이룬다. "일"과 비교당하거나, 육아와 가사를 이고 부업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당신은 내 모든 것들을 평가할 수 없다.
단순한 상상을 한다. 내가 남자였다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여자의 일"이라는 짧은 단어를 붙잡고 여름을 보냈다.
내 이야기를 온전히 그림으로 풀어내는 일은, 그저 오늘 있던 일을 그리거나 지금 마음의 상태를 그리는 것과는 달랐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마음의 화나 죄책감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었지만, 내 이야기를 그리는 건 생각의 깊이나 넓이를 다르게 그려줬다.
계속 그리고 싶고, 하고 있는 개인 작업도 올해가 가기 전에 보이고 싶다.
나는 계속 앞으로의 내가 궁금하고, 앞으로 꾸준히 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