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식어를 찾는 일
전지현과 강동원이라니.
화면 가득 아름다운 피사체들이 서로를 응시하고 종국에는 끌어안는 판을, 나는 ‘북극성’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지현은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남편의 죽음과 함께 서늘하고 슬프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를 지키는 무표정의 사실 어떤 표정이라도 아름다운 남자 강동원이 등장하고, 이 드라마 안의 그 밖의 얽힌 이야기들은 딱히 기억에 오래 남지 못했다. 너무 아름다운 피사체를 가지고 온 어려움은 그런 것이려니 하고, 감독과 작가 (무려 정서경 작가님이신데!!! )의 어려움을 허락 없이 공감해 버렸다.
그보다는 '북극성'이라는 이름이 오래 남았다. 복잡한 이유들로, 전지현은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한 적 없던 대권에 굳건하게 도전한다. 그리고 잘생긴 남자들이 항상 멋있는 여자를 위해 살아가듯이,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큰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사라진다. 강동원의 북극성이 그녀였겠거니 하며, 그녀의 북극성은 무엇일지 오래 궁금했다. 매일 아침 온전히 땅을 박차고 뛰어야 하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의 쓰임을 세상의 증명하고 싶었던 절제된 삶 속에서 그녀의 북극성이 무엇인지, 나는 아름다운 피사체에 홀리고 끊임없이 터져나가는 폭탄과 테러에 홀려 끝내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었다.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우리는 삶이란 게 무엇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태연하게 고민하기 전에 무작정 트랙 위에 놓인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태어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이소라 track9)면서부터가 이 트랙의 시작이었으니,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 혹은 공부를 왜 잘해야 하는지 같은 궁금증 같은 것들도 사치로 삼아야 하는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문득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똑똑한 사람들은 아마도 좀 더 이르게 질문들 앞에 서게 되는가 싶기도 하다. 나의 쓸모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이 사건들이 말해주는 방향은 무엇일까.
올해 초, 평소 하지 않던 Annual Planning을 했다. 나는 막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스무 살도 아니지만, 문득 이제는 더 이상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둘 수가 없어 적었던 올해의 플래닝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을 적은 것이다. '성과가 있는 팀을 만들고, 명확한 내 성과를 만든다' 같은 또렷한 문장들 사이에 '나의 북극성을 찾자'를 쓰고 만 것이다. 9월의 나는 전지현의 얼굴을 보며 올해의 목표를 외면하듯, 혹은 그럼에도 올해의 목표를 버리지는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북극성이 무엇인지 오랜 시간 이 질문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북극성이 대통령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을 상징할 수 있는 게 아마도 권력일 텐데, 그녀가 권력을 탐하는 모습은 없었으니까. 드라마 1,2화에서는 대통령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재력과 통찰 속에서 기획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사가 나온다. 사족이지만, 그녀의 남편을 유력한 대선후보로 올리기 위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들였던 남자의 엄마라는 사람의 '북극성' 역시 결국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극의 마지막의 드러난다. 그렇게 긴 시간 공들여 만든 유력한 대선후보와 달리, 엄청난 기획력과 극적인 이미지들 대로 나가지 않는 서문주(계속 전지현에게 대권 도전을 시킬 수 없으니)에게 짧은 시간 명확하게 대선 성공의 길이 드러난다. 그녀는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속에서 직관을 따라 가는데, 그게 그렇게 정치권과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포인트를 가진다. 한국에 사는 여자라면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 있다. 비디오라거나, 음성이라거나. 극에서 그녀는 그 마저도 처연히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사실 그 부분부터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다음의 그녀가 그 어려운 길을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 좀 아득하다. 물론, 사안의 중요성도 크지만 두 사람 배드씬이라니 너무 성스러워서 좀 아득해진다. (쓰다 보니 다시 볼 필요를 또 이렇게 느끼고 만다...)
어려운 질문들이 극의 마지막에 한아름 토해져 나온다. 존재하지 않는 위험을 만들어서 존재를 증명했던 정치권력들. 그들의 의해 이유 없이 죽거나 나라를 떠나야 했던 젊은이들. 그 서사를 무너뜨리며 그녀가 대선에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판타지 같기도 하다. '북극성'의 감독이 말했던 파워풀한 여성의 서사는 권력을 쥐고 있는 여성,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모든 불합리 속에서 태어나 권력을 무너뜨리는 여성, 그리고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여성들이 나온다. 판타지이긴 하다.
서문주의 북극성은 아마도, 지금 이 그대로의 쓸모를 가진 나를 제대로 사용하는 이나라 같은 판타지 아니었을까.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종북몰이에 부서진 가족사 같은 것들이 옅게 나왔지만, 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된 역사가 죽거나 망가지지 않고, 체재가 되어버리는 통쾌함 같은 것?
그녀의 북극성을 내 안에 오래 질문으로 둔 것은, 그녀의 북극성이 특정 자리가 아니어서다. 그녀의 북극성은 한 문장으로도 명확하게 축약되지 않는다. 8부작을 달리면서 천천히 그들 안의 서사나 관계를 살펴봐야 하고, 현실을 가지고 갔지만 판타지인 드라마와 이 현실을 상응시켜 보며 오는 부조화와 간극을 그대로 체감해야만 그녀의 북극성이 오롯이 또렷해진다. 맥락과 시대를 모두 담아내야지 또렷해지는 게다.
12월 15일이 끝나고 16일로 넘어가는 새벽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한 해가 마무리 되고 있다. 나는 신나게 우리 팀을 만드는 데 내 모든 것을 쏟아붓기도 했었다. 그토록 원하던 글로벌한 업무도 원 없이 까지는 아니고, 가지고 있는 역량 안에서 잘 해냈다. 열흘간 글로벌 프라이싱팀과 워크샵 진행하면서 느꼈던 효능감과 리캡 recap미팅에서 우리가 만든 결과물과 무드 같은 것들. 퇴사할 때, 우리 실장님이 그 프로덕트의 어머니라고 나를 칭해줘서 나는 왠지 충분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11월의 처음으로 회사원 이름표를 떼어 냈다. 2009년 5월부터 시작된 회사원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09년의 우리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인지 중학생이어서, 우리 회사에 놀러 와서 사무실 구경을 한 적 있다. 그 아이가 올해 서른이다. 아이를 낳았던 한 해마저도, 나는 어떤 사람들과 일하고 싶은지 고민하며 보냈었던 회사원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니, 나의 수식어가 간소해졌다.
'나의 북극성을 찾는 사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유 없이 찾아드는 조바심을 지그시 눌러본다.
나에게 선물한 이 안식년이 끝나면 나는 다시 회사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필요한 시간이라고 믿고 2026년의 나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긴 서사이든 혹은 한 직업의 이름으로 귀결되던 나는 나의 북극성을 찾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