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독일 마을
남해 여행을 준비할 때 여러 블로그나 카페를 두리번 거렸다.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는 곳 중 한곳이 남해 독일 마을이었다. 남해에 독일 마을?
독일식 수제 소세지와 가정식이 맛있고, 독일식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곳. 여러 드라마의 촬영지가 될 정도로 풍경이 뛰어난 곳. 이 정도의 정보만 얻고 나머지는 둘러보며 매력을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임에도 독일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고,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다행이 우리의 목적지는 독일마을내에 있는 슈니첼을 잘하는 음식점이었고, 식당 주차장에 아슬아슬하게 주차를 했다. 생각보다 줄이 길었다. 평소 줄서 먹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다른 곳을 찾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찰나에 식당 주인이 나왔다.
[죄송해요 여기까지만 손님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뒤에 분들은 죄송합니다.]
내 앞에 먼저 줄을 서 있던 처형을 가르켜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라 불렀다.
[사장님 저희 일행이에요. 저희까지는 가능할까요?]
운이 좋았다.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되었기에 기다려 식사를 하기로 했다. 기다리며 살펴보니 식당은 11시에 문을 열어서 오후 3시면 영업을 마치는 가게였다. 이런 배짱있는 장사를 보았나. 이렇게 줄을 서있으니 짧은 시간만 해도 먹고 살만하겠다며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식당 매상의 일부분을 담당할 계획이었다. 내 뒤로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려 했고, 매번 '오늘은 여기까지 식사 가능하다네요' 라며, 승자의 미소와 함께 줄서기가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40여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음에도 8명인 인원이 다 앉을 자리가 없어 4명 4명이 나누어 앉아야 했다. 조금씩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했고, 조금만 음식이 늦었다면 실제로 꽤 불평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이 슈니첼은 모든 불평을 잠재워 주었고, 일행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식사를 마쳤다. 마지막 식사였다는 뿌듯함과 함께 수제 맥주 2Set까지 구매해 나왔다.
아까보다 빗방울이 굵어 졌고, 근처에서 커피나 맥주를 한잔 하려던 계획은 틀어지고, 독일 마을을 벗어나려 했다. 빗방울이 내려서인지 차들이 제법 빠져 있었고, 들어오면서 본 광장이 눈이 들어왔다. 잠시 들러가기로 했다. 광장 중앙엔 파독 기념관이 있었고, 독일 맥주와 수제 소세지를 파는 식당이 있었다. 독일로 파견을 갔다는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도 있어 한번 들러보면 좋을 것 같았다.
63년부터 한국에서는 독일로 8,395명의 광부와 10,371명의 간호사가 파견되었다. 독일로 부터의 차관을 대가로 경제 부흥기의 독일의 일손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급여의 80% 이상을 본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고, 그 돈은 고속도로를 세우고, 국가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고되고 꺼리는 일들이었다. 서구체형에 맞는 작업복과 도구로 지하 1,000미터에서의 작업을 해야했고, 간호사들은 독일인들이 꺼려하는 허드렛일이나, 시체닦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해외 인력 파견의 1세대들이었던 그들은 독일 사회에서 한국인의 성실함을 인정받았고, 간호사들은 '코리안 엔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3년의 파견 기간 후에 상당수 인원은 독일에 머무르며, 독일 사회에 정착했다. 성공적인 독일 파견으로 한국인들의 해외 진출이 시작되었다.
남해의 독일마을은 이렇게 독일로 파견되어 정착했던 분들을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는 분들의 희망을 받아, 단지를 조성하고 기념관을 건립했다.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큰 흥미거리도 아니고, 조금만 무리한다면 가까운 해외여행을 나가는 일이 어렵지 않다. 나라의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대한민국의 여권은 세계 150여개의 나라에 비자없이 입국이 가능할 정도다. 나라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 63년도는 어땠을까? 전쟁이 끝이 난지 고작 10년 기반 산업은 모두 망가져 새로이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던 그 시절에 해외 파견은 어떤 의미 였을까? 지금은 BTS, 한국 영화 드라마, K-POP 등 한국이 세계에서 낯선 나라가 아니라지만 그 당시 한국을 알고 있을 만한 독일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극동의 제 3세계쯤 여겨지는 나라에서 파견을 온 노란 피부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공정하고, 따뜻하게 대했을까? 그들의 독일 생활은 고되고도 외로웠을 것이다. 가족, 친지 없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러 온 동료들만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의 말벗과 가족이 되었을 것이다. 낯선 곳과, 언어, 음식, 문화, 어느 하나 쉽지 않았던 그곳에서 새로이 정착하고, 삶을 이어 나갔다.
남해의 독일 마을은 이런 파독 노동자들의 위한 공간이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장소이긴 하지만, 그 뜻이 가상하다. 예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지금이야 꽤 상업적으로 변했더라도, 그들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한 의미였다는 의도 하나만으로도 칭찬하고 싶다.
반짝이는 남해 바다에서 그리웠던 고국에서의 노후를 평안을 이루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