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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Sep 17. 2023

100세 인생. 어디에 방점을?

2주 사이에 5번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보험에 대해 부족한 점을 진단해 준다는 말로 시작하는 전화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보장 내용 확인만 받는 것을 다짐받고도 결국은 월 3만 원대에 부족한 보험을 준비하시라는 테크 트리의 전화를 두 주 사이에 벌써 5번째다. 


이미 필요한 만큼 들었다. 생명 보험도 크진 않지만 하나 준비 해 두었고, 암이며, 간병비며, 표적 약물이며, 실비며, 당장 필요한 부분은 어느 정도 준비를 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며, 정말 나에게 문제가 될 때 너무 캄캄할 것 같아.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준비해 둔 것들이다. 언젠가 빛을 봐야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빛을 볼 날이 또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후회가 될 테지만 달리 보면 보험이 있으니 든든하기도 하고, 막상 큰일 닥치면 준비하길 잘 한셈이니 이러나저러나 잘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보험 상담 전화를 받다 보면 100세 시대 미리미리 준비하시라는 말들을 참 많이들 하신다. 인간의 수명이 이제는 100세 가까이 연장된 게 맞긴 한가보다. 60이 넘는 건 이제 노년의 축에도 못 끼고 칠순이나, 팔순이 넘어야 노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의술은 나날이 발전해 웬만한 병마에도 쉽사리 목숨을 내어주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늙어 죽기에도 오래 걸리고 아파 죽는 건 더 어려운 세상이 된 셈이다. 


그런데..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내 동생과 와이프의 언니는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동생은 30대의 나이에 처형은 50대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일 년에 4-5번은 납골당을 방문한다. 가족을 만나고 먹먹해진 기분은 괜히 납골당을 한 바퀴 빙 둘러보게 만든다. 그럼 참 어리고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들 보인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이 된 내 또래들부터 나보다 적게는 10여 년 많게는 20년을 적게 산 사람들.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의 영정 사진들이 너무도 많다. 각자의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저잣거리의 말처럼 '가는데 순서 없다'는 말을 제일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 그곳인 듯싶다. 


보험만 보면 나는 착실하게 100세 시대를 준비해 오고 있다. 아플 때를 대비해서 치료비, 간병비를 어느 곳이 아플지 모르니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한 보험을 미리미리 준비해 놓았으니, 100세 시대 건강 면에서는 잘 준비하고 살고 있는 축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납골당에서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과연 인생을 잘 살아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지겨운 오늘이 어제 죽은 이에겐 그토록 바라는 내일일 수도 있다" 


나는 과연 충실한 삶을 살고 있을까? 비꼬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충실하던 혹은 충실하지 않게 하루를 낭비하던 다른 이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간은 타인이 얼마나 가치 있게 썼느냐가 아닌 내가 얼마나 가치 있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내가 정말 치열하게 보낸 오늘도 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스쳐간 하루 일 수 있고, 타인의 낭비하는 시간을 내가 아까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확실히 오래 살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오래 사는 것 역시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운까지 따라 주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시간을 오래 갖는다는 것은 나에게만 큰 의미가 될 뿐 나와 관계없는 타인에게는 그리 큰 감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어떻게 살았으냐가 타인에게 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내 삶이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삶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내용이 될 테니까. 긴 세월은 분명 더 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것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얽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니까. 아무리 자연인이 좋아도, 그들을 찾아와 굳이 관계를 만드는 '방송국 놈들'이 있지 않은가. 관계의 총량은 인간의 사회성과도 비례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이라는 뒷배가 있어야만 어느 정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관계는 맺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숙성'이라는 과정마저 필요한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맺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때때로 만져주고, 삐끗거리는 곳은 기름도 치며, 부서진 곳은 고쳐가야 이어져 간다.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시간이 길게 필요한 것이 없지만, 관계를 유지하고 완성해 가는 것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100세 인생은 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이끌어낸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서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도출해 낸 결과물은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결과물- 어떤 삶을 살았으냐의 답변 같은- 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100세 인생의 가치 판단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의 100세 인생은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둬야 할까? 내가 쓰는 삶이란 책은 책의 두께가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한 것일까? 속이 보이는 유치한 질문에 답을 스스로 지키지 못함이 창피해 질문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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