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제 영하를 바라보는 기온에 입김은 용트림처럼 길게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는 찰나 인도 경계석 위로 개구리 한 마리가 보인다. 예전 논에 서 자주 보던 국방색 무늬의 참개구리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꼼짝도 안 하고 있다. 하 고놈 이 날씨에 이러고 있다가는 곧 죽을 텐데 싶다. 아직 겨울잠 잘 곳을 못 찾은 건지. 이 동네 어디에서 요놈이 나온 건지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잠깐 발걸음을 멈춰 바라봤다. 꼼짝을 안 한다. 날씨가 춥긴 한가보다. 개구리는 변온 동물이니 이렇게 추운 날에는 잘 움직이지 못할 테지. 어릴 적 기억으로 한겨울 개울 바닥에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를 잡아본 적이 있다. 뻣뻣하게 굳은 듯 움직여 죽은 줄 알았던 개구리가 살아있었던 경험이 있어 이 녀석도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를 어쩔까 내가 잡아봐야 어디 목숨줄 지켜줄 안식처를 찾아줄 수도 없고, 에잇 모르겠다. 모른 척 들어가자 대신 여기 있으면 고양이한테라도 해코지당할까 도망가라고 쫓아내고 가자 싶었다.
'툭'
가지고 있던 우산으로 툭 건드리니 이런... 경계석 밑으로 쿵 떨어진다. 경계석 밑으로 떨어진 개구리는 근데 더 이상 개구리가 아니었다. 요상하다 둔갑한 너구리도 아니고 갑자기 개구리가 사라졌다. 나는 경계석 밑으로 떨어진 개구리라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냥 돌이다. 심지어 개구리 모양도 닮지 않은 돌이다. 나는 왜 이 돌을 개구리라고 생각했는지 도통 모르겠어 돌을 주워 들었다. 아까 개구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색상 하나만 같았을 뿐 다시 봐도 돌이다. 하..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돌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 아까 그 자리에 올려두고, 아까 개구리를 처음 본 그 자리에 다시 서 보았다. 이제 보니 다시 개구리다. 그 돌은 그냥 돌이었는데 개구리가 놓인 위치와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위치에서 보면 얼핏 개구리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물론 내 눈에만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에 놓으니 개구리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보일만 했다.
사람 사이에도 이런 일이 왕왕 생겨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인연도 있다. 생각하는 것, 먹는 것, 사는 것, 생활 수준 무엇 하나 나와 같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밤새워 통화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맛집을 다니곤 했다. 좋았던 기억만 있던 것도 아니다. 별 것 아닌 일로 다투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그랬다. 연애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했던 동기가 있다. 미성년자일 때도 누군가와 싸워본 적 없었는데 다 큰 성인이 되어 주먹다툼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방법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다른 위치에서 다른 모습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주먹다툼을 했던 그 동기와는 그럴 일도 아니었고, 내가 그렇게 해서도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 사람과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 무엇하나 나와 맞는 게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진지했던 나 자신이 신기할 정도다. 왜 나는 그 당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의 판단과, 선택은 그 순간 그 위치에서 결정한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그 선택이 아니면 안 될 것도 같았고, 그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 선택이 그 순간의 나에게 최선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평생에 있어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크다. 평생을 지금과 같은 환경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과 같다. 어느 방향을 향하던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 성공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공에 다다르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어느 길은 돌고 돌아 성공에 도착한다면 어떤 방향은 아주 다이렉트하게 성공으로 꽂히는 길도 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공에 이른다. 문제는 길이 길어지면 성공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던지 간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 것처럼 누구도 내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 줄 수 없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이 무거운 것이라면 우리는 선택함에 있어 조금은 진지해져도 되지 않을까? 내가 있는 순간과 처한 상황에서 한 발쯤은 물러나보기도 하고, 조금은 떨어져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수고쯤은 해 줘도 되지 않을까?
내가 만난 개구리 왕자는 딱 그 한순간에 보인 신기루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의 모습에 성급히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는 개구리 왕자가 아니었다고 휙 던져 버릴지도 모를 것이다. 그 선택이 바르지 못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깊이 살피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위해 생각한 모습을 찾는 것과 같다.
내가 20년 전에 개구리 왕자를 만났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쉽기도 하면서 지금에서라도 만난걸 행운으로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