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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n 18. 2019

해장국

눈 떠보니 아침이었다. 아니 아침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해가 높이 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벌써 시계는 11시에 가까워졌다. 어제 신나게 마신 탓에 상쾌한 기분은커녕 올라오는 알코올 기운에 다시 침대에 쓰러져 버릴 것 같다. 눈 앞이 밝아지는 동시에 두통이 시작된다. 술 마신 다음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이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이라고 되뇌다 벌써 이번 주에만 이 말이 세 번째라는 사실이 떠올라 다시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생수를 한 통 다 들이켜서야 조금 두통이 잦아들었다. 취준생. 이 타이틀이면 술자리도 늦잠도 모두 OK

취업준비생이라 하면 주위에서는 힘내라는 위로와 꼭 될 거라는 격려가 함께한다. 그렇게 뒤돌아서며 쉬는 작은 한숨을 모른 척하는 건 이제 익숙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고시반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학교 앞 해장국집은 사람이 많은 편이라 되도록 점심시간은 피하는 편이다. 오늘처럼 술 마신 다음날 해장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조금 일찍 찾거나 점심이 끝날 무렵에 한가한 시간을 찾는 편이다.


매번 먹어 익숙한 뼈다귀 해장국을 하나 시키고는 고개 위의 텔레비전에 시선을 둔다. 딱히 보고 싶은 채널도, 궁금한 내용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신문은 벌써 저 편 테이블의 아저씨가 선점했다. 인심 좋게 나온 두 덩이의 등뼈를 익숙하게 발라내어, 뼈를 버리고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았다.이라도 배를 채우지 않으면, 또다시 오후를 숙취로 고생해야 할지 모른다. 어제 얼마를 마신 탓인지 생수병의 물이 알코올처럼 보이고, 순간 구토감도 오른다. 빠르게 해장국을 밀어 넣고, 살기 위해 먹는다 스스로 되뇌며 밥을 먹는다.


[오늘도 늦어?]


문자다. 오늘은 그녀의 취업 발표날이다. 같이 취업 준비를 시작했는데, 그녀는 벌써 최종 면접을 보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필기 통과도 못하고 있다. 직군이 다르다 해도, 대학 성적표의 알파벳만 보아도, 대강 상상되던 장면이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린 친구인데, 어쩌면 취업은 제일 먼저 할지 모르겠다. 전 남자 친구와 한동안 사이가 좋지 않을 때 함께 술을 많이 마셔주었고, 어느 날 헤어졌다며 울며 내게 전화를 했다. 내심 맘에 두고 있던 터라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고, 오래지 않아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성적 좋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는 대부분 이루는 성격의 아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람 좋다는 성격의 나와는 조금 다른 타입이었다. 고등학교 때야 성적이 좋고, 모범생인 터라 대학까지는 나쁘지 않게 진학을 했지만, 성공에 크게 욕심 없던 터라 대학 생활은 그냥 낭만을 즐기는 정도로만 집중했었다. 졸업반이 되어서도 취직은 결정된 바 없고, 그래도 어릴 적 꿈에는 도전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스로의 자존심 세운 약속으로 원하는 직군의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워낙 경쟁률이 높은 분야라, 떨어져도 어쩌면 너무 높은 경쟁률 때문에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거리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취업이 쉬이 될 리가 없지라고 스스로 평가도 하곤 했다.


오늘 합격자 발표가 나고, 만약 그녀가 합격한다면 이제 그녀는 직장인이 되는 거다.


취준생이라는 같은 위치에서 그녀는 나를 버려두고 탈출하는 것이다. 아니 그 탈출은 스스로 밖에 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매도했는지 모른다. 나이 많은 취준생 남자 친구와 직장인 여자 친구...


너무도 뻔한 그림이라 짜증이 날 정도다.


남자는 항상 초초한 체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할 거다. 일 때문에 연락이 되지 않을 때면, 그래 이제 능력 있는 사회인 남자 선배라도 만나고 있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상상과 망상이 또아리를 틀테구, 오늘도 받은 메일엔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나... 아쉽게도 함께 하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상투적인데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거절의 알림'이 이어질 것이다. 자존감은 바닥이 나고,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에도 이제는 학생의 데이트를 할 수도 없다. 남자는 여전히 돈이 없는 취업 준비생인데 여자는 어느새 지갑에 신용카드가 생기고, 기념일에나 찾던 맛집은 데이트 정도엔 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회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는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 아쉬움이 스쳐가고, 여자 친구에게 얻어먹었다는 생각에 남자는 입이 써 음식의 맛도 모른 체 결제하고 있는 그녀 뒤에서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이게 내가 어제 과음을 한 이유다.


점심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편의점 커피를 하나 들고 도서관으로 올랐다. 마침 진동으로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도서관에서 뛰어나오던 그녀가 나를 보고는 손을 낚아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전화를 받는다.


[네.. 제가 Y인데요... 네... 네!!.. 감사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묻지 않아도 전화받는 내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으로 통화의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합격이구나.


[오빠. 나 됐어. 합격이래]


내 손을 잡고는 팔짝팔짝 뛰는 그녀를 보며


[잘 됐다. 축하해. 그동안 고생했어]


최대한 얼굴 표정을 감추며 축하해 주었다. 말하는 순간도 내 표정이 티가 나면 어쩌지라며 조심스러웠지만, 합격에 대한 기쁨 때문인지, 합격했으니 그 정도 질투는 이해해 준다는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내 표정을 잘 감추었는지 그녀는 별말 없이 합격한 소식을 전하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 마시고 들고 있던 커피를 버리기 위해 돌아선 내 머릿속엔 어젯밤의 망상과 질투가 다시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아....


내일 또 해장국 한 그릇을 먹을것 같은 기분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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