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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Dec 12. 2023

선글라스를 보니 방안 온도가 올랐다.

어제부터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며칠은 겨울 답지 않게 날씨가 따뜻해서 좋았다. 아이들 등원시킬 때 버스가 언제 오나 발을 동동 거리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밤 중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며 아내 몰래 담배를 한 대 피울 때도 손이 시리지 않아 좋았다. 젊었을 땐 겨울이 좋았는데, 이젠 춥다. 싫어진다. 마치 가을비처럼 나무에 달려 있던 마지막 낙엽들을 다 떨구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심해졌다. 이제는 겨울비라 불러도 되게다 싶게 차갑고 날카롭게 내렸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씨는 훨씬 추워지겠다. 또다시 겨울이 기승을 부리겠다. 


때로 겨울이면 우리 가족은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시작은 큰아이가 24개월이 되기 전 떠난 여행이었다. 24개월 미만 유아는 비행기의 좌석구매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서둘러 떠났다. 그 뒤로 둘째 두 돌이 되기 전에는 장모님을 모시고 떠났고, 세 째는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추위를 피해 더운 나라로 떠나곤 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떠나면,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훅 치고 들어오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에 여기가 지구의 배꼽 높이쯤 되려나 싶었다. 


그곳에선 어딜 가나 선글라스는 있어야 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플 정도로 뜨거운 태양에 선글라스는 필수였다. 너무 밝아 눈이 부셔 제대로 보지 못하던 풍경도 선글라스면 시원하고 예쁘게 보였다. 눈의 피로감도 덜 했고, 사진을 찍어도 더 있어 보였다. 근사한 여행객 놀이를 하기에 선글라스는 더없이 좋았다. 여행 내내 선글라스는 함께 했고, 어떤 사진을 보아도 나는 선글라스와 함께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눈이 나빠 안경을 꼈었기에 제대로 선글라스를 껴 본 적이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중반에 라섹 수술을 받고 나서야 선글라스를 낄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도수 넣은 선글라스를 구매할 정도의 여유도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눈 수술을 마치고 회복기에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제대로 껴보았다. 안경을 맞출 때 한 번씩 스을쩍 걸쳐보면서 연예인 포스를 기대하곤 했지만 거울 속은 영락없는 선글라스 낀 프로도였다. 무슨 짓을 해도 멋져지지는 않았지만 눈은 편해졌다. 시력을 얻고, 눈의 피로도를 함께 얻은 덕분에 밝은 빛에 시리던 눈은 편해졌고, 조금만 밝아도 찡그려지던 인상은 순해졌다. 그렇게 난 호감형의 인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해도 멋져지지 않던 프로도>


책상 위 노트북 옆에 가지런히 놓인 선글라스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이봐~ 올해는 어디로 날 데려갈 거야?"

"아직 일정이 없어 미안해 올해는 집에 있을까 봐"

"아 왜~ 겨울이라고. 뜨거운 도시는 겨울에 가야 제맛인 거 몰라? " 

"왜 몰라 알지. 그런데 올 겨울은 안 되겠어"

"뭐...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 봐 겨울이라고 겨울"

"그래 생각해 볼게"


올 겨울은 이 친구와 멋진 여행을 못할 것 같다. 때로 맘처럼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기에 잠시 쉬었다 가야 할 시기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선글라스를 보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예전 여행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렇게 새벽에 글을 쓰다가도 선글라스를 보면 해변가의 모래사장이 떠오른다. 축축하게 뜨거운 모래를 밟으며 아이들과 즐기던 그 해변이 생각난다. 방 안의 온도가 살짝 올랐다. 올해는 내가 이 친구를 해변으로 데려갈 수 없을 것 같다. 대신 이 친구가 나를 그 기억으로 안내해 줄 것 같아 괜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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