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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Dec 18. 2023

7살이 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갔다고?

지금이야 버스를 탈 일이 별로 없다. 일단 출퇴근을 하지 않으며, 출퇴근을 할 때는 자차를 이용한 지 오래다. 그런 나에겐 버스에 관한 세 가지 추억이 있다. 지금도 버스 하면 이 시절로 돌아간다. 


7살의 버스_유치원 통학용 시내버스


나에게 버스란 유치원 통학수단이었다. 7살에 병설 유치원에 입학을 하고 우리 가족은 생애 첫 집을 장만을 했다.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마당도 생겼고, 우리들 방도 생겼다. 문제는 병설 유치원에 유치원 버스가 다니질 않는다는 것. 이사 간 곳은 배정받는 초등학교가 다를 정도로 거리가 좀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10 정거장쯤 되었다.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은 나를 데려다주시지 못했다. 대신 버스 타는 법을 알려주셨다. 


"성준아. 여기서 버스를 타는 거야 저기 보면 어디 가는지 적혀 있지?"

"웅"

"저기에 동명초등학교라고 적힌 거 읽을 수 있어?"

"웅"

"그러면 저 버스를 타는 거야 자.. 타자"

"웅"


지금이야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86년도 지방 도시에서는 가능했었던 일이었겠다. 그러니 내가 버스를 타고 다녔겠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주일 정도 함께 등원을 했다. 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어머니가 데려다주시고, 버스를 타면 요금은 어떻게 내고, 어느 곳에서 내려야 하며, 내릴 때는 벨을 눌러야 한다는 것 등 며칠을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그렇게 반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다. 버스를 타면 보통 운전수 아저씨 바로 뒤에 딱 붙어 서 있었다. 보통 같은 시간에 가면 버스 기사분도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때로는 기사분이 먼저 알아보시곤, 어머니께 아이 어디에 내려주면 되지요?라고 묻기도 하셨다. 이쯤 되니까. 어머니도 맘 놓고 보내실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는 버스가 가는 방향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저씨들의 허리춤에 달린 눈은 때로는 어른들의 다리에 가려 어딘지 잘 안 보이곤 했는데. 이리저리 다리 사이로 눈을 돌려가며 내릴 곳을 찾았다. 맘씨 좋은 어른들은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는 내려야 할 곳에서 내려 주시곤 했다.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분명 가는 길에 버스를 탔던 건 기억이 나는데 올 때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병설유치원이라 늦게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도통 돌아올 때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의 첫 버스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7살 아이를 혼자 버스 태워 보낼 생각을 하셨는지 정말 시골이라 가능했던 건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내 기억에는 즐거웠던 추억들이다. 



11살의 버스_정류장을 잃었어요 


이제는 글도 잘 읽고 버스 타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경험도 아니었다. 추석 명절을 쇠러 큰 집에 가야 한다. 큰집은 같은 시 외곽의 좀 더 단위가 작은 시골이었다. 집에서 버스로 3-40분을 가고, 또 그만큼을 걸어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하시러 먼저 큰집에 가시고 나와 동생은 학원 끝나고 함께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꽤 많이 다녔던 길이라 자신 있었다. 

동생과 나는 버스에 앉아 창밖의 풍경에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큰집에서 가면 무얼 먼저 먹을 건지, 옆 개울에서 피라미를 어떻게 잡을 건지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잠깐 한눈을 팔아서일까? 처음 보는 풍경이 계속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는 한번 더 보지 못한 길이었다. 심지어 우리 큰집보다 더 시골길이었다. 주변은 온통 산들이 보이고, 꼬불꼬불 작은 흙길을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버스 안에는 할머니 한 두 분과 우리 형제 밖에 없었다. 더 이상 들어가면 영영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갈림길 없이 외길이었기에 거꾸로 돌아가면 아는 길이 나올 것 같았다. 형제는 벨을 눌렀다. 


"니들 어데 가는데?"

"예.. 왕암가요. 방앗간 있는데서 내려야 해요"

"거긴 벌써 한참 지났다. 여기서 내리게?"

"왔던 길 돌아가면 나올까 싶어서요."

"앉아 있어라. 이 버스 다시 돌아나가니까. 내려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버스는 되돌아가는 버스였고, 인가도 별로 없는 시골길에 아이 둘이 내리려하니 이상하게 생각하신 버스기사분이 자초지종을 물으셨던 것이다. 버스는 돌고 돌아 다시 우리를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려다 주었다. 도착해야 할 시간은 이미 한 참전에 늦어버렸으니 큰집에 가자마자 우리는 정신 안 차린다며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강하게 우리 형제를 키우셨구나 싶기도 했다. 



13살의 버스_버스비 10원이 모자라.  


동네형과 소풍을 가기로 했다. 평소 학교 소풍으로도 가끔 다니던 저수지 근처 유원지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는 전교생 3,000명이 일렬로 줄지어 걸어가곤 했다. 한 반에 50명씩, 한 학년에 10개 반씩 6학년 3,000명 지금 초등학교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인원이다. 그 인원이 일렬로 걸으면 1시간 30분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힘든 줄도 몰랐다. 친구들과 소풍 갈 생각에 재잘재잘 떠들면 금방 가곤 했다. 


이번엔 동네 형과 우리 형제 셋이서 가기로 했다. 버스도 다니니까.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로는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릴까? 세 꼬마들은 유원지에서 뛰어놀고, 간식도 사 먹고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는 아저씨들 뒤에서 물고기 구경도 하고, 이곳저곳을 강아지들 마냥 뛰어다녔다. 한참을 놀고 해가 뉘엿 저물 무렵에 다시 돌아갈 버스를 기다렸다. 주머니 속에 돈을 모으니 210원이 있었다. 그때 학생 버스 요금이 110원쯤 했던 것 같다. 나와 동생은 버스 요금이 딱 10원이 부족했다. 딱 10원. 


지금이라면 기사 아저씨한테 부탁도 한 번 드려볼 법도 하고, 아니면 함께 간 형한테 버스 요금을 빌려볼 요령도 있는데. 우린 그런 선택보다 걸어서 집에 가기로 했다. 소풍을 다녔던 길을 알기에 대충 어느 곳으로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잠깐 부탁보다 긴 당당함을 택하기로 했었나 보다. 대략 7-8킬로 정도 되었으니 아이들 걸음으로 근 두 시간 가까이를 걸었을 테다. 생각보다 해는 일찍 저물었고, 두 시간쯤 넘게 걷고 걸어 집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시간은 넘기고 애들은 연락할 곳도 없고, 오지도 않고, 집은 발칵 뒤집혔다. 어머니는 함께 간 형한테 좀 빌려 타지 그랬냐 셨다. 당시 우리는 그런 생각도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온통 모자란 10원 생각만 했지. 빌릴 생각도 못했다. 

함께 간 형은 어땠냐고? 그 형은 당당하게 버스를 타고 일찍 집에 왔다. 그 형의 주머니에 10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꼬맹이 모두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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