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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an 25. 2024

숭늉 만들때 주의사항

숙취나 급체로 망가진 속을 달래는 데는 숭늉만 한 음식도 없다. 속이 허하거나, 반대로 토사곽란으로 뒤집어진 속은 은근하게 데워진 숭늉으로 살살 달래어 주는 것 만한 게 없다. 한국인은 밥심이라 하고, 무엇을 먹어도 밥으로 마무리한다. 그 여정의 마무리도 밥으로 만든 숭늉이다.


허나 숭늉을 만들기는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아니 간단하지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먼저 밥을 지어야 하며, 적당히 눌러진 누룽지가 필요하다. 누룽지를 햇볕에 잘 말려 단단하게 굳혔다 잘게 부수어 끓는 물에 십여 분간 끓여야 한다. 게다가 넉넉한 물양은 필수다. 자칫하면 누룽지 죽이 되어버리거나 불어 버린다. 쌀만 가지고는 만들 수가 없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은 여기서 비롯된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적절한 순서나 과정이 없이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쌀이 있고, 물이 있다고 숭늉이 될까. 밥도 짓지 않고 쌀만 끓인다고 숭늉이 될까? 재료는 같더라도, 제대로 된 과정이 없이는 결과마저 제멋대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숭늉은 간단치가 않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한 가지가 과정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재료를 쓰면서도 전혀 새로운 요리를 만들곤 한다. 먼저 익혀야 할 재료들의 순서 대신 한꺼번에 쏟아 넣고 끓여버린다든지. 적당한 시점에 제거해야 할 재료들을 끝까지 쥐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자신은 모두 같은 재료를 썼는데 왜 맛이 다를까 의문을 갖는다. 허나 복기하지는 않는다.


새해가 되어 한 해의 목표를 세우고, 준비하는 과정은 수월하다. 목표도 확실하고, 신년의 의지도 아직 충만하다. 재빠르게 움직여 목표를 달성할 재료들도 착착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또다시 겨울이 찾아올 무렵엔 각자 다른 음식을 먹게 된다. 어떤 이는 만족스러운 코스 요리를, 또 어떤 이는 국적불명의 검증되지 않은 퓨전요리를 맛보곤 한다. 재료의 손질, 재료를 넣는 순서, 조리 시간, 간을 보는 방법 모두가 요리의 퀄리티를 좌우한다.


우리의 목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목표의 설정과, 준비과정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제를 잡고, 적절한 소재와 구성 모두 글을 쓰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것만으로 글이 될까? 단어를 쓸고, 문장을 만들고, 문단을 만들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배치를 고려하고, 글을 흐름을 유지하고, 적절한 표현과, 비유, 설명 등으로 나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표현해 초고를 만든다. 그리고 그 초고를 잘 말려 단단하게 두었다가 다시 잘게 쪼갠다.  조사와 어미를 가꾸고, 문법상의 오류도 검증하며 문장을 손본다. 그렇게 적당량의 물과 불로 잘 끓여주어야 구수한 숭늉이 완성된다. 완성된 숭늉은 흰쌀과는 또 다른 매력의 음식이 된다. 쌀과도 다르고, 밥과도 다른 또 다른 음식이다. 하나의 재료를 어떻게 다듬고 요리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글은 완전히 다른 맛을 내게 된다.


모두 하나하나의 과정이 중요하다. 허나 이 과정을 오롯이 지켜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적절한 주제를 찾게 되면 벌써 머릿속에 명문이 하나 작성된 듯하다. 일필휘지로 글을 쓰고는 스스로 만족해한다. 요리의 완성이라 여긴다. 그러나 오늘 쓴 글을 내일 읽을 때는 몰랐던 비문이나, 의도하지 않았던 문장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충분히 숙성되어 나온 글이 아니기에 종종 글머리가 좌충우돌하곤 한다. 너무 급하게 글을 완성한 대가다.


숭늉 짓는 법. 간단하지만 지켜야 할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법. 글을 쓰는 법 역시 과정과 시간과 퇴고가 필요한 법. 우리가 세운 목표, 쓰고자 하는 글 모두 과정이 필요하다. 쌀알이 그냥 숭늉이 되는 일은 없다. 숭늉은 만만하게 볼 음식이 아니다. 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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