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을 도와주는 전자기기 중에 가장 획기적인 제품은 세탁기라 생각한다. 청소기나 식기세척기도 큰 도움이 되지만 의외로 집안일을 하는 데 잡아먹는 시간을 가장 획기적으로 줄여준 기계는 세탁기다. 진공청소기는 청소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청소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사람이 직접 움직여 주어야 한다. 지금은 로봇 청소기도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 내 기준에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며, 제한사항도 많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로봇 청소기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식기세척기는 나름 효율적이다. 그릇을 넣어두기만 하면, 깨끗하게 닦아주고 말려주기까지 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애벌 설거지가 필요한 경우도 있고,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넣을 때는 나름 규칙을 가지고 넣어주어야 제대로 된 설거지가 되어 나온다. 그 에너지가 무시 못한다. 아직 용량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탁기는 굉장한 효율을 자랑하는 살림 머신이다. 세세한 분류를 해서 세탁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검은색 옷들과 색깔 옷들을 구분하여 넣고, 세재를 넣어주면 끝이다. 탈수까지 되어 나온다. 심지어 짝꿍으로 다니는 건조기까지 있으면, 빨래하는 시간은 한 나절 이상 줄여준다. 빠르면 두 시간 이내 세탁되어 나온 뽀송뽀송한 옷을 입을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살림 머신은 세탁기다.
세탁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세탁물을 모으고, 분류하고,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건조기로 옮기기 전 분류작업을 하고, 자연건조를 해야 하는 옷들을 따로 널고, 건조기를 돌린다. 건조가 끝난 옷들은 다시 주인 별로 정리되어 각자의 방으로 보내진다. 적어 놓고 보니 더 복잡한 과정의 일이다. 그나마 우리 집은 옷감의 소재별로 나누어 세탁을 하거나, 컬러별로 나누어 세탁을 하는 디테일까지 지키지 못하기에 몇 단계가 줄었는지 모른다. 더 세세한 단계를 거쳐 세탁하는 집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세탁기가 있어도 때론 그 세탁이 마냥 수월하게 지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이 그러하다. 남자 둘 여자 셋. 다섯 식구의 가정에 연령대는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 40대 중후반 성인까지 다양하다. 아침저녁 하루 한 번씩 세수를 하기만 하여도 기본으로 5장 이상의 수건이 필요하며, 양말도 다섯 켤레, 속옷도 5인 분, 유치원 복에, 중학생 교복 성인 두 명의 의복 등등을 포함하면, 하루 기본으로 나오는 세탁물의 양이 상당하다. 내가 어릴 때는 이틀 이상씩 옷을 입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아니면 우리 가정이 그렇지 않던지. 따님들은 어제 입은 옷은 오늘 입지 않는다. 유치원 다니는 꼬맹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점심시간의 반찬이며, 간식의 종류를 옷에 다 묻혀 알려준다. 결론은 세탁물의 양이 참 많다.
효율을 자랑하는 세탁기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지친 날에 빨래까지 하고자 하면 솔직히 미루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모든 옷감을 건조기에 넣을 수는 없으니 또다시 분리 작업을 한 번 더 거쳐주어야 하고, 아쉽게 걸러진 아이들은 예쁜 옷걸이에 걸어 자연 건조를 시켜 주어야 한다. 이 일이 그렇게나 귀찮기도 하다. 내 마지노 선은 여기 까지다.
건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옷들. 자연 건조가 완료된 옷들은 제 발로 옷장으로 찾아가지 않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이제 시작이다. 옷을 개고, 정리하여, 각자의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거 못한다. 아내에게 미룬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아내와 아이들의 사이즈가 헷갈리기 시작하고, 딸들의 옷들이 서로 누구 것인지 분간이 안 가더니 이제는 봐도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 큰 딸의 티셔츠가 작은 딸의 옷장에서 나오고 작은 딸의 티셔츠는 언니의 옷장 혹은 동생의 옷장에서 나오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결국 손 들었다. 아내가 착착착 예쁘게 개어서 아이들 별로 정리를 해주면 나는 각자의 방으로 배송을 가고, 옷장에 넣어주는 걸로 세탁을 마무리한다.
다른 집안일은 내가 게을러도 밖에서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우리 집 싱크대에 며칠 전의 접시가 있는지, 우리 집 거실에 머리카락 뭉치 몇 개가 굴러다니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 관심도 없다. 그런데 세탁이 게을러지면, 사람들은 안다. 며칠 동안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나를 걱정할지도 모른다. 다른 집안일과는 다르게 세탁은 밖에서 티가 나는 집안일이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매년 세탁기가 발전하고, 이제는 먼지를 털어주는 에어드레서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점점 세탁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만큼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 나의 말, 행동보다 딱 처음에 보이는 시각적인 이미지에 그 사람의 첫인상이 정해진다. 매체의 발달 이후 이 과정은 점점 쉽고,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나를 표현하는 것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시각적인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라면 앞으로 세탁 시장은 점점 세분화될 것이다. 세탁기가 대중화되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해, 건조기가 대중화된 시간은 그 절반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머신들이 계속 디테일한 시장을 개척하고 만들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세탁실이 주방만큼 넓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먹는 것만큼 입는 것도 중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아직 우리 집 세탁실은 우리 집에서 가장 좁은 곳이지만, 매일 나오는 어마한 양의 빨래를 불철주야 소화해 내는 세탁기와 그의 짝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할 뿐이다. 나중에 집을 짓는다면 좀 더 쾌적한 세탁실을 만들어 보는 꿈을 꾼다
오늘 세탁기에서 얻은 교훈
세탁기에 대해서는 교훈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나의 집안일의 시간을 가장 줄여주는 녀석이다. 세탁기가 고장 나면, 동네 사람들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