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틀이었다. 그저 멍하게 마루에 앉아 생각을 비우고, 때가 되면 주인장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과수원을 산책하다가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장작을 쌓아 불을 붙였다. 담요를 한 장 두르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타닥. 타닥!
때로는 나무가 터지며, 불꽃이 별이 되어 하늘로 오르기도 한다. 그 불꽃 주위에서 서윤이는 생애 처음 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막상 아침이 되니 조금 챙피함이 들기도 했지만, 항상 가슴 안이 막혀 있던 기분은 조금 사라진 거 같았다. 몸이 가벼워졌다.
영호와 아이의 장례를 치루고 꼬박 2주를 방에만 누워 있다 처음으로 나온 외출이었다. 집에는 가족들의 흔적이 너무도 많았다. 며칠의 여행으로 조금은 차분하게 그 흔적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도움을 주신 커피숍 사장님께 인사도 드려야 하고, 해야할 일들을 차분하게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몇개의 리스트를 적고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 잘 잤어요?-
- 네.. 어제 밤은 푹 잔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던 것 같아 죄송해요.. 어디 말 할곳이 없이 살았는데..너무 잘 들어주셔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본게 처음이에요.. -
- 저희는 괜찮아요. 그냥... 아픔이 느껴지는데 막상 도움 드릴 수 없어 안타까웠을 뿐이죠.. 그냥 들어드리는 것 밖에 해드릴 수 없어서요. -
- 아니에요.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만으로도 힘이 난다는 거 어제 처음 알았어요. 감사해요 -
- 그럼 저도 좋아요. 아침 차렸는데 함께 먹을래요? -
- 고맙습니다. -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가 또 올라왔다. 어제 볼 때는 가슴 한 켠이 찌릿하고 아팠는데.. 오늘의 계란말이는 왠지 그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계란의 고소하고 간이 잘된 계란말이가 맛있다. 영호에게 만들어 주려고 몇 번을 시도했는데 가지런히 예쁘게 만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아 태워먹기 일쑤였어도, 영호는 남김없이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날것도 같은데 오늘은 잘 참아내고 있다.
- 아! 오늘 사과나무에 가지치기를 하려 하는데.. 시간되시면 같이 하실래요? -
- 오늘요? 오늘 저 퇴실하는 날인데.. 시간은 되요.. -
- 그럼 우리 잠시 쉬었다가 점심 먹고 할게요. 아직은 낮에도 그리 덥지 않아서 일하기도 괜찮거든요. 보통 여름에는 한 낮에는 너무 뜨거운데 지금 날씨엔 낮에 일하는 것도 좋아요. 원래는 겨울 끝날 무렵하는데 게으름에 늦어버렸네요.-
해진과 수인 서윤은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금방 말아낸 잔치 국수를 호르륵 삼키고는 장갑과 가지치기용 가위를 들고 숙소에서 가까운 사과나무 부터 가지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진에게도 가지치기는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껏 아버지가 하시는 걸 어깨너머로 보긴 했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기에 어떤 가지를 잘라야 할지 망설여 지기도 했다. 허둥거릴까 아버지의 가지치기를 천천히 기억해보기로 했다.
-해진아. 요거 왜 하는가 싶지? 멀쩡한 가지를 왜 잘라야 하는가 허지? 나무는 그냥 두면 아주 멋대로 자라거든. 뭐 생긴게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만 잔가지가 자라서 얽히고 빽빽히 자라 버리면 과수가 열릴 공간이 없어져부러. 나무 사이 사이에도 공간이 있어야 바람도 통하고, 습기도 조절되고 하거든. 게다가 나무 가지끼리 겹치게 되면 서로 상처를 내기도 햐. 또 죽어버린 가지는 잘라내 주어야 새 가지가 나거든. 죽은 가지를 그냥 두면 새로운 가지가 생기지 않아. 털어내어야 할 것들은 털어내야 해. 그래야 나무가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거든. 어렵지? 일단 내 하는 거 보고 비스~ㅅ 하게 따라혀봐. 금방 배울거여 -
아버지의 기억을 잡고 가지를 잘라 나가기 시작했다. 해진은 제법 능숙하게 공간을 만들고 죽은 가지를 쳐내 주었지만, 수인과 서윤이는 어떤 가지를 잘라야 할지 허둥거리곤 했다. 수인이는 몇 그루 자르지 못하고는 새참을 만들겠다고 숙소로 올라갔다. 요령을 피울 셈이었지만 모른척 내버려 두었다.
서윤은 오랜 만에 노동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산은 출산과도 같다고 간호사가 일러주었다. 변변찮은 조리를 받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는데 조금씩 솟아나는 땀에 상쾌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과수원 위에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솟아나려는 땀은 금방 씻겨 나갔다.
'왜 가지치기를 하자고 했을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서윤은 해진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지치기를 했다. 해진이는 죽고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 주어야 사과가 잘 열릴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고 설명해 주었다. 서윤이는 어제의 이야기로 자신을 위로 한려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갑자기 잘려나가는 사과나무가 영호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호와 아이의 기억을 잊고,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거야? 그걸 느껴보라는 거야?'
서윤이는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왔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이제 영호와 아이에 대한 추억이 전부인데 그것을 잊으라 말하는 해진이 야속했다. 슬그머니 가위를 내려두고, 뒷걸음질로 나무에서 멀어졌다.
- 힘들죠? 하지 않았던 일이라 힘드실 수 있어요 -
서윤이는 크게 한 숨을 들이쉬고는 쏟아부었다.
- 아니요..일은 힘들지 않은데요. 왜 저한테 가지치기를 하자고 하셨어요? 제 남편과 아이가 죽은 가지처럼 보이시나요? 제게서 잘라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존재처럼 보이셨어요? 어제 밤에 이야기를 잘 들어주신 것은 감사한데요. 저한테 가족을 잊어라 말할 자격은 없으시거든요? 저. 돌아가겠습니다. 더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네요. -
당황한 해진을 뒤로 하고 서윤은 큰 걸음으로 멀어졌다. 급하게 내려오다 마지막 계단에서 헛딛는 해진이 보인다. 이런...크게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