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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Apr 13. 2022

이 글도 와이프가 읽으면 안된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나의 실종 사건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하기 싫을때가 있다. 강이나 호수가 살짝 내려다 보이는 주변 산 언덕에 오두막처럼 외딴 집을 짓고는 그 속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부르는 소리도 없고,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없다. 원하는 시간에 잠들고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며, 원하는 채널을 보고 원하는 책을 읽으며 살고 싶다. 주변엔 차도 없고,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는 곳이면 좋겠다.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싶다. 


어느 순간 부터 나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들 보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 아이들에게 좋은 것, 도움 되는 것, 배우자가 하고 싶은 것 등 선택의 기준이 나의 외적인 것에서 부터 결정되었다. 가족이기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게 맞지만, 어느 순간 나의 실종 사건을 맞닥드리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 아래 양육되어 오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였다. 양육되던 시기에 체험했던 경험들이 취향이되고 기준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 겪게 되는 또다른 경험들이 융화되면서 오롯이 나만의 취향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결혼을 하게되고 생각보다 크게 당황했던 순간들이 있다. 배우자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 나는 해산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배우자는 너무도 좋아한다. 함께 하는 순간들이 좋으니까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양보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더니 배우자는 내가 해산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는 더 달라졌다. 부모의 취향보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 즐거운것 위주로 선택지가 옮겨져 갔다. K-Pop보다 동요에 익숙하고, 또다시 공룡의 이름들을 외울 수 있게되었다. 트리케라톱스는 뿔이 세개고 프로토케라톱스는 뿔이 없다. 라바 아일랜드의 물개 이름은 클라라다. 미혼은 내 또래에게 물어보면 누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알고 있다. 아이들 잘 키우고 있다는 걸 


동시에 실종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예전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모습만을 묘사하고 이사람이 누구인지 지인들에게 묻는다면 과연 나라고 맞출 수 있을까? 괴리감이 너무 커졌다. 



조금은 씁쓸하다. 이런 방법이 옳은 양육 방법임을 믿는데, 가끔 내가 실종된 것 같은 외로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외딴 오두막이 가고 싶을까? 아무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립다. 모든 선택에 있어서 기준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런 상황들이 그립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양육과 개인의 자아간의 균형잡기에 실패한 셈이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것들 중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균형은 무엇보다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아마도 시간이 더 지나 아이들이 나의 품을 떠나도 충분히 잘 지낼 날들이 오게되면 이 순간을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주체하지 못하게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한 숨부터 쉴런지도 모른다. 맘 같아서는 그때의 여유를 잠시 빌려오고 싶다. 그래서 조금은 잉여롭게 살고 싶다. 한동안 잃어버린 나를 찾아보고 싶다. 그렇게 균형을 맞춰보고 싶다. 


답은 알고 있으면서 참 답답한 소리나 하고 있다. 나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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