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르게 윤성은 피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약자가 되거나, 약점이 생기게 되면 방어본능이 작동한다. 괜히 피디를 하는 게 아니다. 김피디는 윤성이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은 없어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 윤성 씨 작년에도 휴가 못 갔지? 올해는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몸 망가지는 건 한 순간이야. 방송 오래 해야지! 안 그래?
-... 네.. 안 그래도 올해는 꼭 가려고요.
피디의 물음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설마 눈치채고 있는 것일까?
지난주에만 벌써 두 번 피디의 라스트 콜을 놓쳤다. 긴장한 탓인지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On Air의 빨간불에 방송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채고는 평소보다 몇 박자 늦게 수어가 시작되었다. 윤성이 조금 삐끗한 상황에도, 대부분의 스탭들은 그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소리보다, 들리는 소리에 익숙하기에 앵커의 멘트와 자료화면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래서 윤성의 실수는 잘 태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윤성 혼자만 몸이 달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치 남들이 모르는 비밀 하나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들통날지 몰라 조마조마 하며 하루의 방송을 감추어 왔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하지만, 벌써 몇 차례 피디의 사인을 놓쳤고, 끝맺음의 타이밍을 못 맞춰 수어가 먼저 끝나 버리기도 했다. 아마 수어를 읽는 사람들은 그런 윤성의 모습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것들 보다 윤성이 스스로 제일 잘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때 피디가 윤성에게 휴가를 넌지시 권했던 것이다. 평소의 윤성이라면
' 누가 저 대신 방송을 맡아요~
' 피디님이 쉬면 저도 쉴게요.
' 저 잘리는 거예요?
등등 맞장구를 쳤겠지만, 이번에 피디가 휴가를 권했을 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담당 피디에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묻지도 못했고, 그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프리랜서 입장에서 휴가 이후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윤성은 고집 피울 수 없었다. 피디와 대화를 나눌수록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졌고, 윤성은 순순히 휴가계를 제출했다. 피디에게 5일간의 휴가를 부탁하고는 병원에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기로 했다.
꼬박 반나절이 걸려 검사를 받았다. 조금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컨디션이 괜찮아진 것인지 그때만큼 소리가 작게 들리거나, 이명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귀는 문제를 일으켰고, 언제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윤성을 쫓아다녔다.
오후 늦게 집에 온 윤성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오늘 뉴스에 대해서 몇 번을 읽고, 주의할 단어와 새로운 단어들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할 때다. 괜히 TV는 켜기 싫었다.
- 와. 정말 할 게 없네...
몇 년 동안 제대로 휴가를 떠나 보지도 못한 윤성은 졸지에 남아버린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휴가의 계획은 첫날 아침에 받은 종합검사가 전부였다. 결과는 2-3일이 걸린다고 한다. 다행히도, 휴가 복귀전에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는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일정이 텅 비어 있다. 윤성은 20살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대학 공부에, 알바에, 운동에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여왔다.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이고, 갓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고, 그 다짐대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윤성에게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아프거나, 죽었을 때뿐이라고 했던 술자리의 농담이 떠올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어쩌면 자신의 커리어가 여기에서 끊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허탈한 웃음이 새었다. 윤성은 소파에서 머리를 기대 천정을 바라보았다.
- 아! 저기에 저런 얼룩이 있었구나. 저쪽 벽 쪽이 조금 내려앉은 건가? 벽지도 꽤나 누렇게 변했네...
갑자기 주어진 시간, 멍하니 보내려니 갑자기 자신이 쓸모 없어진 것 같았다. 책을 읽을지, 아니면 지난 방송을 모니터링을 할지 고민했다. 갑자기 어제 방송에 늦어버린 파이널 콜이 생각났고, 갑자기 귀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 삐이!!!!!
윤성은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울컥 화가 났다. 지금까지 남들보다 열심히 달리고 노력했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신의 삶이 이렇게 한 번에 무너져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띵동!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해진과 수인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해진과 수인에게 예약 알람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일 기다리면서도, 막상 울리면 묘하게 불안하기도 한 그런 기분이었다.
- 오빠! 예약인가 봐!
- 진정! 진정! 확인해 보자.. 진~정하고~
이제는 제법 민박집 사장님 태도 나고, 잘 청소된 방이며, 잘 말려진 장작들과 화로대, 깨끗하게 쓸어낸 언덕길과 벤치들이며 언제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예약 메일 알람 하나면 두 사람은 다시 초보 사장님으로 돌아가 허둥거리기 일쑤다.
- 언제래? 얼마나 남았어?
- 어? 그게... 오늘인데??
- 어? 오늘? 바로? 지금이 4시가 넘었는데? 어머 어머 뭐부터 챙겨야해?
오늘부터 2박 3일 남성 한 명의 예약 메일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안 그래도 허둥거렸던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괜히 왔다리 갔다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인은 해진의 대답에는 관심도 없이 혼자 중얼거리고는 혼자 창고로 뛰어가 부족한 부분은 체크하기 시작했다.
" 당일 예약합니다. 지금 출발하면 6시쯤 도착할 거 같습니다. "
예약란의 메모를 보며, 해진은 그래도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냉장고에 식재료가 얼마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았다. 손님이 한 명이라면 지금 있는 정도도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당황하긴했지만 이미 준비는 끝이 났다.
- 수인아 6시쯤 도착하신대~ 두 시간 정도 남았다아~
스탭룸으로 뛰어가는 수인을 보며 해진은 기대감으로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수인은 무언가 빠진 것이 있는지 다시 둘러보고 있었고, 해진은 커피를 먼저 준비할지, 장작을 먼저 채워 넣어야 할지, 오늘 밤의 날씨는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다.
해진과 수인의 허둥거림은 누가봐도, 명절에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같은 모양새다. 잘 챙겨두었던 가장 좋은 것들만 고르고 골라서 내어줄 요량의 그런 모습이었다. 무엇을 하나 더 내어 놓을 수 있을까. 무엇을 준비해야 기분 좋게 머물다 가실 수 있을까? 조금은 밝은 얼굴로 여기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잔뜩 기대어 설레어 하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