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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Feb 28. 2023

나의 평안함이 깨어졌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대학 4학년은 참 여유롭다. 평균 학점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려 마지막 학년 만이라도 4.3에 가까운 학점을 얻기 위해 공부를 좀 해야 하는 것 말고, 전략적으로 가능한 기업의 인적성 검사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 말고, 고맙게도 학교로 찾아오는 취업 리쿠르팅에 참여해 눈도장을 찍고 자소서를 첨삭받는 것 말고, 한 두 개 정도만 더 자격증을 따는 것 말고, 900점은 넘기는 토익 점수를 준비하는 것 말고, 면접 준비를 위해 2-3개 정도의 취업 스터디 활동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대학 4학년은 참 여유가 넘친다. 


그건 남의 이야기다. 


반골기질 덕분이랄까? 나는 마음먹었다. 전공을 살려서 원하는 직업을 갖기로. 중고등학교 때 스스로 다짐했던 넥타이를 메지 않는 직업을 갖기로 결정했다. 그랬더니 더 여유가 넘치는 4학년이 되었다. 


- 형 오늘 신문 읽었어요? 이거 조선이랑 동아랑 한겨레랑 완전히 보는 시각이 다른데 어떻게 읽어야 해요? - 

- 제일 먼저는 사실관계가 먼저야. 판단은 그다음의 문제고 일단 그것도 중요한데.. 오늘 저녁 한 잔 할까? 방송국 선배들도 온다네 - 

- 오~ 근데 또 거기예요? 어제도 갔었는데... - 

- 됐고 7시에 온다니까 이따가 먼저 볼래?- 

- 넵 그럼 이따가.. 거기서 - 


오늘 하루도 다 지나갔다. 이제 점심을 겨우 넘겼지만 저녁 약속이 잡혀 버린 이후론 통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없다. 오전 내내 신문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했지만 생각은 명주실처럼 술술 풀리기는커녕 고양이가 가지고 노는 털뭉치처럼 엉키고 설켜서 어디서부터 끊고 맺어야 할지 정리조차 되지 않는다. 복잡해진 생각을 달래는 데는 드라마 만한 것이 없다. 어제 보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를 숙제하듯 다시 본다. 


주인공은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청춘이다. 열심히 살지만, 자신의 몫을 다 하고자 노력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결국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살기로 결정하고, 모든 인생 목표를 가족에 두고 살아간다. 좀 신파적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며, 카메라 시선이며 음악 모두 기대 이상이다. 어느새 그냥 빠져들었다.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오후의 짧은 햇살은 소리 없이 흩어져 버렸다. 


며칠 전 만난 수인이 떠오른다. 꽤나 긴장을 했던 첫 만남이었고 예상외로 대화도 잘 통했다. 물론 처음엔 잔뜩 긴장해서 뭐라고 떠들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는데. 냉면을 불어 먹는다는 걸 들켜버리고는 드라마처럼 긴장감이 사라졌다. 


- 오늘 즐거웠어요 덕분에 조금 덜 심심한 하루를 보냈어요 - 

- 음... 다음에 보면 우리말 놓기로 해요 그냥 편하게 - 

- 네?? 다음에? - 

- 그런 잘 들어가요~ 오빠 - 


수인은 헤어지는 순간에 다음에 보면 말을 놓자고 제안을 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또 만나자고 해볼까를 30번쯤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인이 먼저 말을 꺼냈고, 난 찌질함을 조금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곧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건 날은 수인이가 바빴고, 수인이가 문자를 보낸 날은 내가 그랬다. 그런 엇갈림이 2주쯤 되어간다. 그날의 대화는 이미 몇 번이나 되새겨 봤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이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학년은 나와 같은 4학년이지만 나이는 나보다 어리다. 맥주를 좋아하지만 독한 술도 곧잘 마시곤 한다고 했다. 그 클럽은 오늘 처음 온 거고 보통은 홍대로 자주 간다고. 키는 꽤 커서 힐을 신는다면 나보다 클 것 같았다. 


' 보고 싶은데 .... ' 


[오늘 바빠요? 저녁에 혹시 시간 될까?]

문자가 왔고 난 선배와의 약속을 취소했다. 뭐 욕은 한바탕 얻어먹었지만 이곳의 술자리는 한 주에 3번꼴이니 하루쯤은 튕겨도 그만이다. 어디로 가자고 하지? 


[혹시 극장 건너편에 포장마차가 있는 거 알아? 괜찮다면 거기서 볼까? 나름 운치 있거든]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 좀 근사한 곳에서 보자고 했어야 할까? 포장마차라 싫어하지는 않을까?부터 오늘 포장마차가 안 열리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고민까지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동안에도 시선은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집에 들러 멋지게 꾸미고 가야 할지 이대로 가야 할지 머리는 괜찮은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쓸어 넘겨 보았다. 아무리 그래봐야 거울 속의 나는 잘 생겨지지 않았다. 


[응 알아 지나다니면서 봤어 한 반도 안 가봤는데 가보고 싶었어. 7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


예쓰-다 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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