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도 12월에 이어 고작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우리 친구들은 또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다. 근 30여 년을 병과 싸우셨지만 쾌활하셨고, 정이 넘치셨던 분이다. 작년에 치렀던 상도 슬펐다. 역시 병으로 어머님을 잃은 친구는 힘들어했고, 우리는 안타까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자주 경험하게 될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고, 아직 부모님을 잃기엔 이른 나이라고 스스로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3개월 만에 또다시 장례식장에서 만나야 하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쉽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당황해했고 저마다 그들의 부모님의 안부를 걱정했다. 장례식장에서의 술자리야 흥이 날 일이야 없지만, 직전의 장례보다 더 가라앉은 얼굴에 표정들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
나는 세월호가 가라앉던 해 동생을 보냈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이별이었다. 더욱이 남은 가족들 모두 큰 상처를 받았던 이별이기에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동생을 보름 만에 찾고, 보내는 모든 과정은 지금까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너무 상해버린 동생이기에 내 동생인데도 쉽게 볼을 어루만지지도 못했다. 너무 무서웠고, 무서웠다. 현실감이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마지막까지도 가족들은 결정하지 못했고, 그 선택마저 동생의 친구들에게 위임해야 했다. 어머니를 위한 결정이었고, 가족을 위한 결정이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족들이 상처받을까 염을 끝내고 입관하는 것만을 참관하기로 했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수의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운 덩어리만으로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했고, 우리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받아들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동생은 뜨거운 불길 아래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수골 된 유골함을 받았을 때 느꼈던 뜨거움에 당황했다. 마치 동생의 마지막 생명인 듯한 느낌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고, 안고 가는 내내 식어가는 열기에 안타까웠다. 동생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던 나에게 그 순간이 동생과의 마지막 시간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식어진 유골함은 더 이상 따뜻해지지 않았다. 식어가는 유골을 동생 친구들에게 맡기고 우리 가족은 이별을 했다. 어디인지 장소를 알면 어머님이 놓지 못하실까, 자식을 보내는데 너무 힘드실까 유족에게 알리지 말고, 동생의 친구들만이 아는 장소에서 모셔달라 부탁을 했다.
100여 일이 지났을 때 동생 친구들은 어디에 동생이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동생은 생각보다 잘 모셔져 있었고, 그 후 동생 친구들과 우리가 소식을 전하는 공간이 되었다. 포스트잇으로 서로에게 동생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을 읽으며 서로가 잘 살고 있구나 하고 엿본다.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 이야기를 하는 동생 친구들을 보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잘 살고 있는 모습에 괜히 울컥한다. 내 동생도 지금이면 어땠을 텐데라는 욕심을 아직 내려놓지는 못한 듯싶다.
친구 어머니를 한 줌의 가루로 만든 화장터에는 온갖 새싹들이 오르고 있었다. 벚꽃이 피고,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나 있었다. 봄바람은 시샘도 없이 따스함만을 나기는 날씨였고, 가벼운 외투 하나만 입어도 송글 땀이 날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이 싱그러웠고, 생명력이 넘쳤다.
10년 전에 동생을 보냈던 나도, 3개월 전에 어머님을 보냈던 친구도, 오늘 어머님을 보내는 친구도 모두 슬프다. 10년 전에 보냈다고 나아지지 않았고, 3개월 전에 먼저 경험했다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늘 이 친구가 느낄 상실감과 안타까움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고, 서로 알기에 힘껏 악수하고 등을 두들겨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 살아갈 것이다. 슬픔을 극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삶에 이별은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그 아픔과 상실감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기억의 대상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과 감정을 기억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