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hamalg May 23. 2016

09. 이성과 감성 사이-1

sense and < SENSIBILITY

인간이라면 이성적, 감성적 판단을 적절히 섞어 답을 도출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불어닥친 문제의 한복판에선 그 누구나 한없이 고독다. 우선은 벗어나고 보자 싶은 감성적 사고가 충동적 결정을 부추긴다. 그렇게 허둥지둥 소용돌이에서 탈출하여 모든 것이 잠잠해진 뒤, 이성이 돌아오면 그제서야 침착하지 못했던 미성숙함을 시간을 찢어버릴 듯한 강렬함으로 후회하곤 한다.


절망의 소용돌이가 닥치면 여지없이 이성과 감성의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후회의 경험은 쌓이고 결정의 순간, 경험적 사고가 내 앞을 불쑥 가로막는. 감정적 대처가 초래했던 후회의 경험들이 충동적 결단을 제지하고 나선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후회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란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본능의 충동과 감정을 조절하여 논리적 판단을 이끄는 전두엽의 발달은 실제로 25~30세 정도에 완성된다고 한다. 즉, 청춘이 적어도 한 번은 꺾이고 노화가 개시된 이후에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지.


그러나 암만 나이를 먹다 못해 죽을 쑤어 퍼줄 만큼 먹어도 사랑에 한해서는 경험적 사고가 제 역할을 못하는 낭패가 종종 발생한다. 실패한 사랑의 경험은 이성적 판단능력을 키우기보단 사랑을 불신하게 되는 극단적 결론으로 우리를 몰아세우곤 하지. 혹독한 과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학습효과라곤 없는 이유는 사랑으로 엮이는 인간관계의 본질이 애초에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실패라는 절망에 (또다시)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애초에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라는 깨우침만이 경험이 우리에게 는 유일한 교훈이다.

이렇다 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극단의 감정인 사랑이라는 놈에게 붙잡히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수 밖에는 별도리가 없다. 찬란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그 찬란함의 끝에서 어김없이 겪어야만 했던 기나긴 어둠의 기억에 부르르 치를 떨며 평온한 현재에 만족해버리고 만다.


사랑 무서운 줄 몰랐을 땐 나의 정체성을 갈고닦아 그에게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곤 했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머리가 커갈수록 인격은 점점 완성되어가고, 이미 형성된 인격에 타인이 영향을 끼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운명의 반쪽을 만나, 함께 인격을 형성해나가는 사람들이 그래서 가장 부럽다. 포기할 수 없다고 이미 규정지어버린 요소를 바꾸려 드는 그의 요구에 일일이 맞춰 나의 일부를 바꾸느니, 그냥 일찌감치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렇다면, 30이 넘어 만난 사람들은 당최 어떻게 무려 평생을 함께하고자 마음을 먹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에 나와 생일 저녁을 함께 먹어준 30대 남성은 '사랑 같은 게 어딨어.'라고 일축해버린다. 그래도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너무한다 싶었지만 크게 개념치 않는 나 자신에 더 놀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두 번 다시 사랑은 없는 걸까. 결국 서로의 현실적인 조건에 부합하고, 지금 내 삶을 앞으로도 무리 없이 유지해나갈 수 있겠구나 싶은 사람이 결혼할 나이를 먹은 시점에 내 옆에 있다면 그냥 그렇게들 가버리는 걸까?

받기에 앞서 주어야 하고, 살기에 앞서 집을 지어야 한다. 나는 내 동료에 대한 사랑을 마치 어머니가 젖을 줌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완성했듯이 나의 피를 내줌으로써 완성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완성하려면 희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텍쥐베리, 아라스로의 비행


주는 게 두려워진 나는 주지 못해, 그 무엇도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 린지도 모르지. '사랑 같은 게' 없다고 믿는 이 남자도 사랑을 먼저 받는다면 그제서야 사랑을 믿고 다시 나에게 돌려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먼저 주었다 돌려받지 못한 과거의 트라우마는 좀처럼 그럴 용기를 심어주지 못한다.


그렇게, 감성적 관계를 일절 차단하며 마음의 평화를 안간힘으로 지키고 있는 와중에 우연은 또 너를 내 앞에 데려다 놓았어. (발라 발라 꼬미꼬 라 발라 발라 보니따 발라 발라 무에뻬 라 치카 발라 보니따)

<실연의 아픔은 사랑을 성숙하게 한다>
사랑에는 마음의 고통이 따른다. 고뇌는 사랑의 그림자다. 그러나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전보다 훨씬 점잖아진다. 마치 진한 맛의 치즈처럼, 한 인간으로 숙성해간다. -헤르만 헤세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일깨워준 사람. 나를 한 차원 더 성숙하게 만든 그 사람을 여의도 길바닥에서 마주했다. 나보다도 그가 먼저 나를 발견했지 싶다. 꽤나 먼 거리에서 동료와 걸어오던 그와 나는 서로를 계속 쳐다보며 각자의 길을 걸어 점점 가까워졌고, 그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꾸벅 고개 숙여 목례하고 빠르게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와 함께 여의도를 마지막으로 걸었던 건 무려 3년 전이다. 함께 했던 추억을 N드라이브에서 샅샅이 훑고, 이성적 사고가 끼어들 틈을 상실하기까지는 고작 30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내 이성을 끊은 사람은 또다시 그 사람이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찬란하지만 빛바랜, 유일한 과거의 훈장.


from.
1.
너 만난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게 바뀌고 있는 거 같아. 아침에 눈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고,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고, 회사 자리에 앉자마자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잠깐 틈이 나서 바람 쐬러 가게 되면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점심 먹을 때 오늘은 어떤 메뉴를 먹는지, 점심을 먹기는 하는지 궁금해지는 사람이 생겼고, 밥 먹고 와서는 내가 오늘 먹은 메뉴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졸릴 때 '잠 깨!'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생겼고, 퇴근길에 바람이 좋을 때 손잡고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비가 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고, 항상 웃게 해주고 싶고 웃는 모습만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2.
너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 옆에 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계속해서... 내 옆에. 지금처럼!


시간은 흘러 흘러 그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이 흐른 만큼 그의 시간도 공평히 흘렀을 테니,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흔적도 남았을 리 없겠지. 그러나 여전히 그 시절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마음의 평온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를 뒤로하고도 다양한 만남을 가졌고, 그들에게는 이성적 잣대를 그렇게 냉정히 들이댄 주제에. 왜 이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여태 층층이 쌓아온 경험의 교훈을 처참히 무시하고 다시 감정에만 100% 충실한 야생의 삶으로 회귀하고 마는 걸까.


to.
3.
그리고, 난 쭉 오빠 옆에 있을 거야. 오빠가 나를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그가 나를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딱 그때까지만,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을지 궁금할 뿐이다.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굳게 믿던 나는 분명 흔적조차 남지않았다. 내가 원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거듭난 전혀 다른 나는, 그와의 미래를 원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다만 그 없이 내가 지내온 시간을 그는 어떻게 보냈을지 막연히 궁금할 따름이다.


영원히 궁금만 하다 끝나야 할 텐데. 이성과 감성, 그 사이에 나를 제지할 경험적 사고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분홍 셔츠를 입은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던 그 사람의 얼굴만 두둥실.


'사랑 같은게' 없다 믿는 그 사람이 보고싶다.

현재의 나는 거기에 존재하기에.


-끝.-

매거진의 이전글 08. 복 터진 지구인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