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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n 08. 2016

10. 이성과 감성 사이-2

SENSE > and sensibility

1.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혼합체다.

'옳다' 믿는 행동이 감성적 사고에 위배될 경우, 마음이 동하지 않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어떤때에는 마음 가는 데로 흘러 가다 '그릇된' 실수를 이미 저질러 버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알파고가 아니지 않은가.


2.  지구 상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개체수만큼이나 다양한 가치관, 도덕관, 윤리관이 존재한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의식의 흐름이 모두들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다면 단순하고 좋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인지, 각양각색의 다양한 의식의 흐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인간 문명의 위대한 미덕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존경받을 수 있는 기준은 드물지언정, 존중받지 못할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듯 다양한 도덕관, 그리고 내 안에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갈림길에서 무엇이 옳은지 갈팡질팡 하는 우리네 후손들에게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은 아래의 위대한 지표를 제시해주셨다.

일반적 윤리는, 인간의 행위를 (그 이익을 고려하는 인간의 편에서) 가능한 한 최대량의 행복을 창출하도록 이끄는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제러미 벤담


다음은 도덕과 윤리의식을 판단하기 위해 널리 쓰이는 실험인, 트롤리 딜레마이다.

딜레마 1.
열차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 밖에 서 있고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로변환기를 당기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선로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선로변환기를 당기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딜레마 2.
열차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를 사이에 둔 육교 위에 서 있고, 바로 옆에는 상당히 무거운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아래로 밀쳐서 그 무게로 트롤리를 멈추게 하는 것인데,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출처: 정성훈,『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 법칙』, 2011.

1번 질문에는 무려 85%의 실험자가 선로변환기를 당겨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섯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대답한 반면, 2번 상황에서는 오직 12% 만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섯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위대한 제러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본 전제로 가지고 간다. 실제로, 뇌에 손상이 발생하여 감정 처리에 이상을 보이는 환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리 없이, 무척이나 쉽게, 공리주의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히 5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 판단하고 망설임없이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은 선로변환기(딜레마 1.)가 아닌 같은 동족(딜레마 2.)을 직접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여 열차를 멈추는 일에 감정적 거부감을 느낀기 마련이고,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상황에서는 겨우 12%만이 다섯 명을 구할 것이라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명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과연 정말로 공리주의적인 해답일까?


위의 딜레마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나의 이성적이고 공명정대한 결단으로 죽게 된 (딜레마 1: 다른 선로에 있던, 딜레마 2: 육교 위 무거운) 사람이 10명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의 생사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5명의 목숨보다는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사소하여 기꺼이 희생되는 편이 사회에 이롭다고 결론지은 나의 판단이 여전히 공리주의에 위배되지 않는다 할수 있을까? 나의 선택으로 그의 자녀 10명이 쫄쫄 굶어 죽게 된다면? 혹은, 100명의 삶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기부를 할 작정이었다면, 불치병으로 알려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면 등등)을 죽이고 살려낸 다섯 사람이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였다면? 내가 살려준 덕에 무사히 서울 시내 한복판에 폭탄을 설치하는 미션에 성공했더라면?


이성적이고, 공명정대하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선택은 이렇듯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누구도, 감히 한 사람의 인생을 비교적 사소하고 하찮다고 판단할 수 없다. 나 자신이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인생은 나의 인생뿐이다.

그들의 목숨줄이 운명의 장난으로 우연히 내 손에 들려버렸을지언정 끊어버릴 자격까지 나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딜레마 1에서, 선로변환기를 당겨 그 한 사람을 죽여버리는 일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우리가 도덕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1) 큰 소리로 이 사태를 선로 위 사람들에게 알린다. 2) 열차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3) 모든 조취를 취했음에도 시간적 제약때문에 열차가 다섯 명의 사람을 치고 말았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로 위에 서있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러한 사고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힘쓴다.


딜레마 2의 경우, 육교 위 무거운 사람이 다섯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의사가 전혀 없고, 이 세상에 살아남아야 할 백만 가지의 이유를 가졌다 한들 지나가던 행인에 불과한 내가 이 사실을 알 길이 없다. 그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 쥐뿔 개미 똥만큼도 모르는 주제에,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내가 다섯 사람을 살리는 일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그의 죽음이 타당하다 판단하여 육교 아래로 그를 밀어버리는 일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 대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인류의 숭고한 목적 달성을 위해 나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도덕에 위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다섯 명을 살릴 만큼 충분히 무겁지 않아 모두를 살리지는 못할지언정, 두 명 정도는 살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희생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불가피하게 총 여섯 명이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판단으로 나의 목숨을 희생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훌륭한 도덕은 지식에서가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다.
- 아담 스미스


나라는 사람은 현재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전인류의 숭고한 목적 달성에 기여하려 애쓰는 사람으로는 평생을 살아낼 자신이 있는데, 단지 나 개인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가 아리송할 뿐이다.

행복한 지구는 이성을, 행복한 나는 감성을 갈구하지만 뇌에 손상이 간건 아닌데도 어찌된게 나이를 먹을 수록 감정처리에는 점점 더 미숙해진다. 감정을 절제하고, 숨기고, 표현을 자제하는 사회적 스킬만 발달할뿐. 내적으로 감정을 철저히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나의 행복도 불가능은 아닐텐데, 차단하지 않으면 폭발하고 마니까. 가둬두는 수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행복은 멀다.


퇴근길,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문득 울컥 울고 싶어 진다.

이성과 감성 사이, 울 이유가 하등 없는데 왜 그러지 싶은 생각으로 눈물을 말린다.

그러게. 슬플 일이 하나도 없는데 문득문득 울고 싶다.

우습게도 이젠 슬플 일 같은건 모두 없어져버려서, 울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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