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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l 24. 2016

12. 완벽한 결과주의자.

완벽을 결정하는 기준은 완벽히 떳떳해야 할 것이다.

결과주의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올바른 선택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라고 주장한다.'(존 포트만, 『죄의 역사』)


이에 따르면, 나란 인간은 결과주의자의 범주에 빈틈없이 완벽하게 구속된다.

기나긴 취준 생활을 외로이 보내고 있는 당신은 어렵사리 원하던 기업의 최종 면접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전망이 끝내주는 회사 17층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인사부가 위치한 11층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시원하게 볼일을 본 후, 목에 걸린 사원증을 찍 늘어뜨려 출입문을 유유히 통과해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이 면접관의 일상은 당신이 평생을 꿈꿔온 생활 그 자체다.

꿈이 당신에게 물었다.

"제가 1년 전 오늘, 여러분들께 5,000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1년의 시간 동안 2배로 불려 오라는 미션과 함께 말입니다. 1년이 지난 오늘, 어떤 이는 최선을 다하였으나 목표 금액에 한참 미달하는 8,000만 원을 가져왔습니다. 또 어떤 이는 불법적인 방법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목표액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는 회사가 원한 5,000만 원의 수익을 안겨주었습니다. 본인은 전자와 후자 중 어떤 사람입니까?"


결과주의자들은 아마도 '최선의 결과'를 위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다. 5,000만 원을 1억 원으로 불리는

'최선의 결과'를 위해 동원된 모든 수단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하게 의(義)롭다. 결과주의자에게는 '최선의 결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만이 악(惡)이다.

누구에게도 피해 입히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을 준수한들, 회사를 실망시키는 '3,000만 원'의 수익은 무의미하다. 사회에 약간의 피해를 입혔을지언정, 아무도 모르게 사소한 위법행위를 감행했을지언정,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는 목표 달성에 성공한 인간이다. 어쩔 수 없이 수반된 약간의 불법적 행위들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훗날 돌이켜보니 이는 '최선의 결과'를 위해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재치와 융통성 넘치는 똑똑한 선택이었다 결론 내린다. 그리하여 나의 일기장에는 또 하나의 빛나는 성공담이 기록된다. '최선의 결과'에 기여하는 위법행위는 실상 '올바른 선택'이 된다. 쓸데없이 착한 척, 고고한 척하다 회사가 나에게 부여한 '최선의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합법적으로 최선을 다해야겠다 결정한 나의 과정은 옳지 않은 '선택'에 불과하다.


'완벽한 결과주의자'들은 완벽한 결과를 추구하기 때문에 완벽한 과정이 도출하는 '결과'만을 진정한 '최선의 결과'라 인정한다. 떨리는 목소리로 고작 3,000만 원에 그친 부족한 성과를 꿈에게 내보일 수밖에 없지만, 후회는 없다. 부끄러움도 없다. 나는 '최선의 결과'를 위해 주어진 환경과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시간을 1년전으로 되돌린다 한들,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 리 없을 것이며,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지난 1년간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 또한 되돌려짐을 의미하기에, 노력하는 나의 과정은 동일할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이 법칙은 여지없이 적용된다. 한때는 열정적으로 소통하며 서로의 일상을 꿰뚫고 있던 그가 어떻게 지내나 문득 궁금하기도 하고, 만나면 반가울 것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끝내 받지 않은 새벽 2시에 걸려온 마지막 부재중 전화 2통 역시 내내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시절 그와 나는 서로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충성하며 최선을 다했다.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우리의 현재가 지금과 다를 리 없다. 더 배려할걸, 더 양보할걸, 더 사랑할걸 같이 씁쓸하고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후회 역시 전혀 없다. 그보다 더 배려하고, 그보다 더 양보하고, 그보다 더 사랑할 순 없었기에. 정말 완벽하게 최선을 다한 결과였으니 ‘남보다 못한’ 현재가 ‘최선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번호를 아무리 삭제해도 여전히 선명한 그의 번호는 영원히 써먹을 일이 없다고 의식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지지만, 그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애를 썼던 우리의 현재는 남보다 못한 사이에 불과한데 이전과 같은 최선을 쏟을 자신도, 의욕도 남지 않은 우리의 재도전은 원수보다 못한 사이라는 결과로 끝날 것이다.


'완벽한 결과주의자'인 나는 '최선의 결과'란 떳떳해야 한다 믿는다.

즉,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사회에 떳떳해짐으로써 나의 결과와 과정은 완벽한 최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을 희생하여 5,000만 원을 달성한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나의 양심을 견고히 지켜냄으로써 앞으로도 무한히 나의 양심을 착취할 회사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었다. 유해성이 전혀 없는 동시에 그 어떠한 효능도 없는 약을 만병통치약이라 선전하여 5,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면, 안전운전을 하는 내 차 앞에 누군가 고의적으로 튀어나와 악의적인 보험사기를 친다 한들,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이라면, 기억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완벽히 떳떳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를 호소한다 한들, 과거 나의 사기행각을 알지 못하는 자에 한해서만 나의 억울함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회사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꺾어버린 나의 양심은,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비양심자들이 나에게 입힐 모든 피해에 '최선의 결과'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합리성을 부여한다. 양심을 꺾은 나라는 비양심자는 본질적으로 나와 동일한 인간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어린 시절 읽은 탈무드의 내용 중 아직까지도 종종 곱씹어보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일을 하려던 농부는 농기구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소 친분이 있는 옆집 농부가 여분의 농기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부리나케 옆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평소에 일 잘하던 그를 남몰래 시기하던 옆집 농부는 농기구를 빌려주지 않는다. 며칠 뒤, 이번엔 옆집 농부의 농기구가 망가져버렸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농기구를 빌리러 갔다. 예상과는 다르게 선뜻 농기구를 빌려주는 그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난번 내가 여분이 있음에도 빌려주지 않은 사실을 알지 않는가? 이리 선뜻 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라네."


그렇다.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저런 인간들을 마음껏 비웃고 욕하며 살기 위해서라도 똑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다.(회사 메신저의 8할을 차지하는 뒷담화 시간이 사라진다면 그 기나긴 업무시간을 어찌 견딜꼬. ^.^)


물론 달성하지 못한 '5,000만 원'의 수익이 여전히 아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한방이 아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무엇이라도 배웠을 테고, 실제로 '3,000만 원'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도 있지 않았는가. 그다음은 모를 일이다. 5,000만 원의 수익 달성은 지난 1년간의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달성해야 하는 '최선의 결과'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생겨난다. 나의 인생은 내가 떳떳하게 이룬 완벽한 '최선의 결과'들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


자식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물려주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들은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과오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다. 나의 비양심적인 과거는 결연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살아나가는 나의 피붙이들이 비양심적 가해자들을 당당하게 비난하지 못하는 환경과 조건을 형성한다. 본인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욕하는 셈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목표 달성에 실패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글이 이렇게 길어진 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했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아 마주하게 되는 결과는 마땅히 책임질 각오가 되어있다. 1년의 시간 동안 놀고먹은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면 나의 실패는 당연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난날의 후회 역시 당연하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의 평온을 제게 허락하십시오.
대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꿔갈 수 있는 용기를 제게 허락하십시오.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시옵소서.
-에픽테토스

모든 것을 차치하고,

나의 맛깔나는 욕설은 썩히기엔 너무 특출 나다.

 뒷담화여 영원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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