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수 없다면, 부셔버릴래.
그는 나와의 은밀하고도 사적인 관계로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없었다.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것이라 단언했던 비현실적 몸매와 외모의 sns 이성친구들이 꾹 눌러준 좋아요♥로 본인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고, 위안받는 그의 불안정한 자아를 과연 동정해야 하는지, 깔보아야 하는지 가늠이 잘 서지 않는다.
<1. 그 여자들과의 관계를 끊거나, 2.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사진을 게시하거나, 그것도 싫다면 3. 그 여자들에게만이라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개별 메시지로 전송하라.>는 나의 요구는 그의 격정적인 분노 표출과 함께 그대로 묵살당했다. 지난 몇개월간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함께 쏟았던 진지한 노력 때문에라도, 그의 반응에 상처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그들의 좋아요♥를 지키기 위해 나와의 사적인 관계를 깔끔히 포기했다. 나와의 인연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가 맘 편히 #셀피, #카스타그램, #몸스타그램 사진을 올리며 본인의 존재를 시시때때로 증명받고 있는 현재의 삶이 훨씬 더 그 답고, 그렇기에 훨씬 더 행복해 보이는 거겠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본인의 자산을 자신이라 인식하는 그에게, 본인이 제단한대로 본인을 인지하는 가상 관계만큼 그의 인정 욕구를 충실히 충족시키는 관계도 없을 테니. 현실 속 사랑보다, 가상세계의 좋아요♥를 택한 그의 결단이 그런 의미에서는 탁월한듯싶다.
결단코 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나 혼자 독차지하려 발버둥 쳤기 때문에 실패한 걸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깨달음과 함께, 앞으로 만날 사람들 역시 혼자 독점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불길한 예감은 확신에 가깝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 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하는 것이며, 존재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누군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고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라고 설명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꼴에 존재양식으로 체험되는 후자의 사랑을 숭배하는 주제에, 그가 지금 현재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왜 하고 있는지 나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며 서로에게만큼은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길 바라는 모순덩어리.
나의 모순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에서 기인한다. 사랑이 많은 사람의 끝은 왜 항상 처량해지고 마는지. 언제라도 나를 훌훌 떠날 것 같은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지 못하면 신뢰할 수 없는 나는, 그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고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일에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그가 떠나면 찾아올 이 행복의 종말에, 불안은 필연적이다. 사랑하는 만큼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순애보는 구속으로 변질된다.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것이라 지껄일지언정 무슨 일이 생길지 알게 뭐야 싶은 마음속 깊은 불신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굳어진다. 확실한 구속으로 행복을 견고히 하지 못할 바엔, 그를 일찌감치 떠나보냄으로써 얄팍한 행복을 포기하고,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다. 결국 그를 향한 이 어이없음과 분노 역시 동족 혐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지.
정작 사랑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구속부터 하려 했던 나는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선량해 보이지만 그런 나의 선량함이 단지 나의 착취적 내심을 가리는 가면에 지나지 않을 경우, 또 애국심으로 충만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의 이기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경우 - 이런 경우의 외관, 즉 나의 외적 태도는 나를 움직이는 실재의 힘과는 첨예한 모순관계에 있게 된다. 나의 태도가 나의 성격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성격구조, 즉 내가 드러내는 태도 이면의 진정한 동기가 나의 참존재이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사회적으로 심히 선량하다 칭송받는 나의 '외적 태도'를 이끌어내는 '실재의 힘'이 무엇이라 단호히 정의 내리는 일이 쉽지 않다. 과연 나의 목표가 순수히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함인지, 혹은 이를 통해 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인지 나조차도 헷갈리는 것이다.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가지고 싶은 물건들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나는 아마도 후자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거겠지. 그렇지만 시간에 지남에 따라 전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꿈꾼다. 지금의 나는 나의 위신을 위하는 길과, 사회를 위하는 길이 최대한 오래도록 같은 방향이길 비루하게 바랄 뿐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체신이나 위신 따위에 꿈쩍도 없이 초연해지고, 더 나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삶의 동기로 자리 잡아 모든 나의 외적 태도를 결정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길.
소유물로 본인의 존재를 확인받는 인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소유물에 미련두지 않고 나라는 인간 그 자체로 본인의 존재를 증명받는 인간.
얼마나 더 잃어야 후자의 인간처럼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하게 되는 걸까. 그러나 둘 중 어느 부류가 더 우수하고, 더 행복하다고 감히 평가할 순 없다. 지겹도록 하는 말이지만, 존경받을 수 있는 기준은 드물지어정, 존중받지 못할 기준은 어디에도 없으니. 물론, 누가 뭐라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강한 의지의 인간이 조금 더 폼 나 보이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떠한 생각과 가치관을 단지 소유하고 있는 인간, 그리고 어떠한 생각으로 온전히 이루어진 인간 중, 그 생각과 가치관에 더 진실하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쪽은 후자일 것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크지 않다.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나 자체가 아닌, 나라는 사람과는 분리된 소유물에 불과하기에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자 되려는 것인지, 되고자 가지려는 것인지.
가지려는 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불행해 보일 테고, 이루고자 하는 자는 가지려고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우스워 보일 테지.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상대를 판단할 자격은 없다. 그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린 시절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떠오른다. 소년은 아끼던 조랑말이 병에 걸리자 찬물을 먹이며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지만, 말은 결국 죽고 말았다. 슬픔에 잠겨 우는 소년에게 전날의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찬물이 병든 말에게 치명적이란 사실을 몰랐니? 사랑한다면, 상대방에게 맞는 방식을 알아야 하는 거란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내가 잃어버린 최초의 좋지 않은 조각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나 또한 그에게 찾고싶지 않은 잃어버린조각으로 남았을 것임을 확신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