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꿈을 꿨다.
핸드폰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 기사님은 40만원을 내놓으라셨다. 에헤라디야 똥폰 가고 아이폰 오는구나. 하는 동시에 드라이브에 미처 저장 않은 사진들, 잊고 싶지 않은 감정과 인생의 순간순간을 찌글찌글 새겨둔 메모들, 그리고 되새기고 싶은 수많은 대화 기록에 사무치게 그리움을 느낀다. 언제든 볼 수 있을 땐 단 한 번도 돌이켜본 적 없는 주제에. 이미 꽤나 흐릿해지기도 했을 지난 2년간의 추억과 기억을 영영 잃지 않으려면 똥폰을 되찾지 않을 도리 없는 것이다. 무려 24개의 30일을 통째로 흘렸으니, 40만원 피눈물을 머금고 뱉어낼 수밖에. 말도 안 되는 돈 낭비에 한심하다는 남들의 눈빛에 움츠려 들어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면 훗날 앗차 하고 뒤늦게 40 아닌 400만원을 내놓는데도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은 대게가 내가 아닌 인간들에겐 하찮은 법이다. 오직 나에게만 의미를 지니기에 더욱 가치 있고, 더욱 소중해지는 까닭이다.
개꿈, 그리고 잡생각 #1.
상식 밖의 행동이라는 힐난과 질책을 피해 다니며 남들의 인정을 쫒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주관과 신념을 잃고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주관과 신념의 부재로-원하는 것이 없거나 알지 못해-남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삶의 끝에서 모든 이들의 박수갈채를 받는다면 나의 삶은 타인의 유희를 위한 한 편의 연극에 그치지 않을까 두렵다. 나란 인간은 사지가 실에 묶여 관객을 위해 영혼 없이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언뜻 거창해 보이는 '주관'이니 '신념'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들의 실재는 단순 명료하기 그지없다. 본인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생각이다. 결국에는 나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義) 그름(不義)의 구분에 불과하지 않을까? 옳은 것과, 그른 것은 항시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어 본질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라 애매모호함이 낄 자리가 없다. '사람은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마음속 꿈틀거리는 욕망이나 야심을 누구보다 빠르게 성취하고파 조바심이 나고, 다소 손쉬워 보이는 그릇된 선택과 행동 앞에서 망설이는 순간이 도래한다. 어떤 것이 옳은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그릇됨으로 비겁하게 이룬 결과물은 그 어디에도 떳떳이 내보일 수 있을 리 없고, 타인의 선망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의 인정마저 자아낼 수 없는 성과는, 욕망이나 야심을 진정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한순간의 불의에 현혹되어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떳떳한 삶은 일평생 회환으로 남는다. 그 아무리 고되고, 괴로워도, 옳다 믿는 길을 굳건히 걸어온 본인의 역사에 뿌듯하고 자랑스럽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기대했던 성과의 달성 여부와 무관하게 후회가 남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한점 부끄럼 없이 떳떳한 과정이 목적이었기에.
살다 보면 시시때때로 불의와 타협할까 싶은 유혹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이미 유혹에 넘어간 수많은 타인들은 융통성 있는 삶이 쿨하다는 거짓부렁을 서슴지 않을 테지만 '주관'이니 '신념'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한순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나는 그들처럼 영혼 없는 꼭두각시 신세로 타락하고 만다. 그리고는 꿋꿋이 '주관'이니 '신념'이니 '가치관'을 운운하며 정의(正義)를 지켜나가는 고귀한 인간들에게 끝없이 상식의 잣대를 내세우며 한심한 눈빛을 쏘아댄다. 그들도 하루빨리 나 같은 한낯 꼭두각시로 변모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그러지 않고서는 내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부정할 수밖에 없다. 꼭두각시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다 같은 족속이라며 자신의 불의를 합리화시킬 수 있으나, 숭고한 인간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는 나의 하찮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주위의 시선과 평판에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미천한 중생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빛나는 신념을 품은 이들에 한정된다. 그러지 못한 이들, 꼭두각시들의 참견은 시기 어린 질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어쭙잖긴 해도-신념으로 살아가는 나를 감히 흔들 수 없다.
타인의 상식에 떠밀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人生) 아닌 부생(浮生)을 살고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개꿈, 그리고 잡생각 #2.
태생적으로 칠칠치 못한 나는 평생 동안 참으로 수없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몇 대의 핸드폰과, 또 몇 개의 지갑들과, mp3들, 화장품들, 사도 사도 2주 이상 쓰지 못하는 펜들. 그래서일까, 물건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되어버렸는데 실은 크게 집착하지 않아 더더욱 흘리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한번 내 사람이 된 관계에는 크게 집착하고 마는데 그래서일까, 실은 놓치지 않으려 너무 애썼기에 종종 내다 버려지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내다 버려 아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손에 넣은 이상 어떻게든 써보려고 애쓰는 나는 어떤 관계도 제대로 버려본 적이 없다. 혹여 버렸다가 되찾고 싶어 지면 어쩌지 싶어 어지간하면 버리지를 못한다. 좋게 말하면 인내심이 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련하고 찌질하다. 버려진 쪽과, 버린 것을 되찾고 싶어 하는 쪽 중 더 큰 후회는 과연 누구의 몫이려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쪽보단, 본인을 직접 후회스러운 상황에 내몬 쪽이 역시나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내리는 저주에 불과한지도 모르지.
40만원을 주고 찾은 핸드폰 안의 시간보다도 아득히 먼, 과거 저편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의 뜬금없는 전화로 내 저주의 효험은 분명해졌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그 시절과 다름없었으나 그와의 시간을 송두리째 뺏긴 후, 뒤돌아본 적 없는 나의 목소리는 그 시절의 울림과 확연히 달라 묘한 이질감에 휩싸였다. 각자 다른 시공간에서 대화하는 기분.
정말이지 놀랍게도 그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했을 일련의 사건들을 줄줄이 읊어대는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만큼 너무나 희미해진 그와의 기억은 계속해서 희미해지다 영원히 사라지겠지. 너무나 힘들었던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만족하지 않던 나를 놓아버린 일에 후회 없다는 그의 고백에 기분이 묘했다. 2년이나 지난 새벽 1시의 발신전화가 후회와 아쉬움이 아닐 리 없기에. 상황이 나아진 지금의 내가 너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서로 그토록 최선을 다했음에도 사단이 났는데 어떻긴 뭘 어때라며 무정히 말을 끊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빨리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고도 빌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그 모든 말들이 진심이었기에 그는 두 번 다시 나에게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맞지 않았을 뿐, 그는 좋은 사람이고 어떤 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운명처럼 들어맞을 것이다. 그저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 그를 볼 수 없게 된 이후,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 줄기차게 걸었던 주문의 말.
아무리 소중한 것도 익숙해지면 그 가치를 깜빡 잊어 후회가 뒤늦게 뒤통수를 친다. 그제서야 아차 싶지만 이미 소중했던 사람과 나의 시공간은 뒤틀려 영영 찾을 수 없다. 손쉽게 내다 버린 나 또한 금세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지금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지금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만 반짝이는 것,
그대가 망설이는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것,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것,
그건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않을 말.
-황경신, 『국경의 도서관』-
개꿈, 그리고 잡생각 #3.
똥폰에 담긴 내 지난 2년의 가치를 고민하다 보니, 나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어느 정도 일까 궁금했다. 전생에 영 악질은 아니였는지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그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으레 존엄한 존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 존재가치가 있으며, 존엄한 가치를 보장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우습게도 우리네 인간들이 우리끼리 복작복작 정한 원칙이다. 원숭이나, 돌고래, 외계 생명체들이 들으면 털 많은 인간들이 퍼트린 '털 많으면 미인'과 같은 유언비어와 비슷한 수준의 원칙일지도 모를 일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목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와 관련한 중요한 일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금 다시, 헌법』)
그러나 본인의 목적 달성을 위해 타인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타인의 인생을 착취하는 인간도 여전히 존엄할까?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런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는 존재를 감히 한낯 욕망의 도구로 사용해버린 셈이니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은 인간이 아니기에 존엄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음 생엔 도깨비나 저승사자로 태어나 영원히 고통받을지어다. 그리고 도깨비나 저승사자가 공유나 이동욱처럼 생길 확률은 단언컨대 제로다. 자유와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완수하지 않는다면 자유과 권리는 박탈당해 마땅하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존엄한 인간들이 존재하기에 그러하다.
인간이라고 무조건 그리고 저절로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인간답게 행동하여 자존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야 존엄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금 다시, 헌법』-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또다시
그래야만이 존엄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될 테니.
오늘도 또 다짐해본다.
그리하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개꿈 한번 꾸고 참 잘도 우려먹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