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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Dec 22. 2016

19. 12개의 30일을 차곡히 쌓았다.

올해의 첫눈이 올해의 처음이란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눈을 맞으며 추위에 떨었던 2015년의 겨울이 방금처럼 생생해서 새로이 봄, 여름, 가을이 차례로 왔다 가버린 기억은 되레 생경하다. 어제도 내린 눈 같은데, 첫눈이라니. 손 내밀어 맞이하자 차가운 구름 조각들은 이내 빗물이 된다.


우리는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이 안타까워 이를 12개의 30일로 묶고, 1년이라는 상징적 단위로 쪼갠다. 12개 30일의 한 묶음이 끝나고 새로운 묶음이 시작되어도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고, 한 달은 여전히 30일이지만, 다시금 첫 번째 30일이 왔으니 이번 묶음은 뽈뽈히 쌓아나가자 다짐하곤 한다. 첫눈은 이번 묶음의 끝과 새로운 묶음의 시작이 임박해왔음을 알린다. 지난 묶음에서 흥청망청 써버린 24시간을 이번에는 아껴 쓰리란 각오가 이맘쯤이면 눈처럼 내려 마음을 간지럽힌다. 또, 돌이켜보게 된다. 여느 묶음보다 기복이 심했던 12개의 30일을, 그래서 유난히 다채로웠던 나의 2016년을. 감정이 소용돌이에 나부꼈고, 더 많이 고민했고, 나아갈 길은 더욱 명확해졌고, 그로 인해 꽤나 단단해졌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들이 많아져, 벅차고 기쁘게 첫눈을 맞는다.


월정사에 가니 전나무 숲길이 곧게 뻗어있었다. 이렇게나 고요한 찬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 마신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눈이 사르르 밟히는 소리가 발부터 찌르르 올라와 귀에 또렷이 박힌다. 오래지 않은 과거엔, 주위가 고요하면 속은 되려 시끄러워지곤 했다. 온갖 생각과 고민, 걱정들로 온 몸이 가득 요란스러웠는데 그렇게 혼자만의 소란에 갇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던 석촌호수. 왜 그렇게 비관적인 상상 속에 자신을 내몰았던 걸까.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에 심취해 혼자 휩쓸리고 비틀거리며 흔들렸던 그 시간 속의 나는 좀 외로웠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말 한마디 뱉기 위해 석촌호수를 며칠이고 뱅뱅 돌며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종종 눈물바람으로 끝나곤 했던 그 고요함의 끝이 때때로 필요했던 나는 아마 그즈음부터 산책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인격과 가치관이 어느 정도 단단해진 2016년의 겨울엔 무엇을 할까 말까의 답은 꽤나 명료해져 큰 고민이 필요 없고, 어떤 인간으로 성장해야 할지 항시 유념하고 있기에 미래에 대한 근심도 나의 인생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못한다. 적어도 온전히 평온해질 수 있을 만큼은 성장한 나는 반짝이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순수히 감격하고, 일상에선 쉬이 들을 수 없는 새소리에 금세 감동한다. 그저 나이를 배불리 먹어 등이 따수워진것 뿐일까.


애기때부터 절을 많이 다녔는데, 부처님께 절을 올릴 때면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우쭐했었다. 어른들과 똑같은 동작을 취한다는 것 자체에 뿌듯했을 뿐 딱히 소원이나 기도를 올린 기억은 없다. 아! 딱 한번, 절을 올리면서 소리 없이 강력한 방귀를 뀐 적이 있다. 꼬맹이 딸내미의 만만치 않은 생화학 공격에 아빤 부처님께 사죄드렸고, 나도 덩달아 죄송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며 용서를 구한 적이 있다.

그래도 나이 먹고 소중한 게 꽤나 생겨버린 요즘은 소원 빌 기회가 생기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꼭 악착같이 절을 올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 수 있게 해달라 부탁드린다. 항상 지금처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고 영원히 품고 살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모두 지금처럼 많이 함께 웃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가을 구인사에서 마주친 스님은 아직 시집-못 간 게 아니라-안 간 그녀와 나에게 부처님께 좋은 짝 만나게 해달라 꼭 빌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셨었는데. 어쨌든 나의 기도는 부처님께 드리는 부탁이라기보단, 내 마음속에 다시금 꾹꾹 눌러 새기는 다짐에 가깝다. 앞으로 몇 묶음의 12개가 주어질지 알 수 없으나 떳떳한 인간으로 눈감을 수 있게 항상 타협 않고, 포기 않고, 노력하고, 고민해야지. 한순간의 굴복으로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놓칠 순 없다.


연말이다 보니 요 근래, 이전 직장 분들과 부쩍 자주 뵀다. 계속 남았어도 잘했을 텐데 라는 아쉬움 섞인 인사치레가 그들의 진심이 아닐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나는 곧이곧대로 믿는다. 사실 승승장구 까진 못했을지언정 이쁨 받으며 평균 이상은 이루었을 거라 자만하고 있다. (엄만 장난 섞인 말투로 열등감도 문제지만 너같이 착각하는 것도 정상 아니라며 혀를 끌끌차신다. 진담 아니고 농담 맞겠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하고, 알아주는 이 없어 쓸쓸할때 분명 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이직 결정엔 일말의 후회도 없다. 더 넓은 세상이 내 마음속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나의 세계는 그때에 비할 바 못된다. 지금은 나의 무한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만, 그땐 위에서 내려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고, 충실하면 할수록 나의 가능성은 윗분들의 판단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이 꽤나 종종 쿵하고 앞을 막아서지만 가야 할 목적지가 명확한 지금의 나로서는 돌아가고 싶지도, 돌아갈 수 도 없어 어떻게든 해결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부셔버리든, 날아가든, 굴러가든 갈길은 정해져 있고 몇 개의 7일을, 몇 개의 30일을 혹은 몇 묶음의 12개월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결국엔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당시엔 사람 환장하게 했던 예상 밖의 장애물이 후에 돌아보면 뜻밖의 성과로 발전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 뭐라도 하나 더 배우거나, 의지에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고난의 끝에선-어려움의 스케일과는 무관하게-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성장했기에 한숨 쉬면서도 한편으론 변화할 내모습을 은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너무나 가벼워 오나 마나 한 월급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 여지껏 월급날이면 피눈물을 훔쳐내곤 한다.


연어를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너무나 맛있다며 곰처럼 먹어치웠다는 동기의 리뷰를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터라 추천을 믿고 방문한 연어 전문점에서 언니들과 함께하는-아마도-올해의 마지막이 될 식사를 했다. 숙성 연어는 탱글거렸고, 와인에다 치즈까지 서비스로 주신 데다 흐르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연말 분위기에 한껏 신이 났다. 언니들은 요즘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는데, 특별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없는 것 같아.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결국 못하고 있는 일이니까. 하고픈 것들을 죄다 해내면서 성실히 하루하루를, 그렇게 차곡차곡 30일을, 또 그것들을 쌓아 12개월을 채웠다.


어떨 때에는 이미 손쓸 수 없어진 지금의 묶음을 서둘러 뒤로하고 새로이 첫 번째 30일을 시작하고 싶어 새해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또 어떤 때에는 너무나 완벽했던 이번 묶음을 끝내는 게 못내 아쉬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기도 했다. 2016년의 끝과 2017년의 시작은 유별나게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강렬한 피날레는 없었지만 12개의 30일이 내 안에 견고히 쌓였다. 흥분하여 뛰거나, 욕심내며 아등바등 거리지 않고 2016년을 차곡히 쌓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밟고 지나왔다. 나잇값을 계산해보면 올 한 해 먹은 나이는 분명 제값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에 먹은 나이들 중 제값 못하는 나이들이 꽤나 있어 문제긴 하지만.

오던 길 지금처럼 꿋꿋하게 계속 걸어나가 다음번, 그 다음번 12개의 30일들도 이렇게 내속에 쌓여 제값 하는 나이를 먹고 싶다.


쓰다 보니 일기가 되어버린-아마도-올해의 마지막이 될 글.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뉴이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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