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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l 01. 2017

26. 행복에 재미까지 바라진 않으려 한다.

그래야만이 행복이라도 거머 쥘테니.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이지 신나 보였다. 그시간, 그 자리에서 그녀는 주어진 시간이 흐르는 것이 마냥 아쉬운듯 했다. 지난 주말, 플루트리스트 최나경의 talk & concert에서 행복한 사람이 뿜어내는 밝은 에너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절감하고 나서야 나 자신이 빛바랬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1.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횟수로만 따지자면 5년, 더 정확히는 4년 6개월 만에 인생의 첫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국제행사의 연사로 초청받은 만큼(거창해 보이나 막상 예상보다 소박했다.) 태생적으로 주목받는 것에 사족을 못쓰는 나는 일주일간 옴짝달싹 못하고 윗분과 함께하는 절망적인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공식적인 업무는 큰 탈없이 순조로웠다.

나도 꽤나 빛나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 중 무려 5일을 울며 지새워야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순간순간 기쁨이 스치는 찰나-세 모녀가 함께 하는 프로듀스 101 시청-를 제외하고는 줄곧 침울하다.


나에게 행복은 단순 명쾌하다. 나 자신이 빛나고 예쁘면 그뿐이다.

옳다고 믿는 일, 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들을 직접 실천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참 대견스럽고, 곧 행복해져 버린다. 올바른 생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기에 생각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는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빛나는 내 모습을 나도 알고, 남도 아는데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출장에서 달고 온 짙은 혼돈과 혼란으로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해야 하는 일(실천함으로써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일. 즉, 행복해지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점점 더 불쾌해지고 만다.


talk & concert였으니 그녀는 토크도 하고, 연주도 해야 했다. 훌륭한 선곡으로 공연에서 이렇게까지 감동받아 두 손 모으고 집중하게 되는 일도 드문 일이지만, 오랜 외국 생활로 어눌해진 한국어 토크에 거부감을 느끼기는커녕 감명씩이나 받다니. 행복한데, 재미있기까지 한 일을 업으로 삼은 인생이 부러웠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뭐예요?" 혹은 "어떤 일 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같은 질문은 정말 대답하기 곤욕스럽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내 모습이 좋다. 나는 책을 읽는 내가 좋다. 나는 공부하는 내 모습이 대견스럽다. 나는 꾸준히 일기를 쓰는 내가 뿌듯하다. 습관적으로 메모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합리적인(도덕적인) 동기나 근거, 이유를 바탕으로 발현되는 행동들은 나 자신을 우쭐하게 만든다. 융통성은 부족하나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나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떳떳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나는 나라는 인간이 썩 마음에 들고, 또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을 하는 '내 모습'이 좋은 것이지, 그 일이 좋은 건 아니다. 싫은 것도 아니지만.

그 일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즉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의지를 수반한다. 무거운 몸뚱아리는 침대에서 영원히 자빠져있고 싶으나,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버린 아침 시간을 후회하며 딱 그만큼 나 자신에게 실망하리란 것을 알기에, 겨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다.

시간이 흐를수록 맥이 빠져버리는 의지로 행복마저 서서히 소멸되는 것 같아 울적해진다. 의지의 축소는 자신에 대한 집착의 끈마저 느슨히 하여 하루하루 너무나도 소중해 흘러가는 것조차 아까웠던 시간들이 그저 별일 없이 소멸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2.

발제를 무사히 마치고, 신경이 곤두서는 일정들이 일단락되어 한시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긴 했으나 마음이 무겁진 않았다.

방콕에서 1969년부터 성황리에 게 커리를 팔아온 유명 식당의 점심시간이 되길 기다리던 그 카페에서 "너 일 그만두고 남자 친구 따라 미국 갈 거야?"라는 폭격을 당하기 전까진.

그리고, 원래 폭격이란 한 발에 끝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이일을 하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아낌없이 썼고, 힘들게 여기까지 왔어. 이 일이 인생 절대 불변의 조건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것 같은 네 모습은 굉장히 서운하다."


"회사 가지고 재지 마."라고도,


"너는 회사의 자산이고, 네가 앞으로 나가게 될 거라면 회사로서는 더 이상 너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거나, 키워줄 수가 없어. 손실이 더 막대 해질 테니."라고도.


"네게는 회사가 보잘것없는 것일지 몰라도 우리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를 들을 때쯤 에어컨 바람 소리로만 가득했던 그 카페는 소란스럽게 눈물을 뽑아내는 나로 가득해졌다.


일정 부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가 되면, 그 상황에 맞춰 나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으니,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회사를 가지고 잰 게 분명했다. 아주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정녕 내가 회사를 나가게 되더라도 최대한 오래도록 이 회사에 남아 있는 것이 회사로서도 유익할 것이란 생각은 오만한 판단이었구나 싶었다. 떠날 거라면, 지금 당장 꺼져주는 것이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일 테니.

문제의 핵심은 떠날지 안 떠날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날의 일정은 종료되었고, 밤이 되었고, 루프탑에 갈 수밖에 없었고, 나는 정말이지 그러지 않을 수 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선임 매니저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던 불만 표시의 최대치는 남들 다 칵테일 시키는 그 바에서 꿋꿋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확인 사살이 시작되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야?"

"내년에 그 사람 미국으로 떠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결혼부터 해. 그 남자가 정말 너랑 결혼할 생각이라면 여지껏 진지하게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너를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던져둘 리가 없다고 본다."

"결혼하고, 회사 그만둬."


이쯤 되니 극도의 스트레스로 정말 숨 쉬는 게 불편해져 어느새 헐떡이고 있었다. 진짜 죽이시려는 건가.

그리고는 방금 말은 실수였다며 취소! 를 외치신다. "너한테서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듣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 말을 들을 바엔, 차라리 내가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은 돌릴 수 없고,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그런 말을 들어버린 내 마음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결혼은 커녕, 연애한 지 고작 8개월이 지난 그 사람과의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지난 시간 나의 열정과 시간을 서슴지 않고 바친 회사를 포기할 순 없다. 또 이 회사에 열정과 시간을 바치기 위해 치루어야 했던 희생들을 소용없이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도 포기할 순 없다. 현재로서는 지금 만나는 이 남자와의 미래가 포기할 수 없는 그 미래에 가장 근접하다. (과거엔 다른 남자들과의 미래가 그러하였으므로, 장담할 순 없지만)

나는 욕심이 많아 양자택일을 할 수 없을 뿐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하여 행복해지기 위해 일도 해야겠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도 해야겠다.


"일의 가치가 크지 않은 게 아니라, 저로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도 행복해지기 위해선 일만큼이나 소중하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계신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본인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나를 모욕하거나 비난할 권리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존경받을 수 있는 기준은 드물지언정, 존중받지 못할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고  여긴다. 본인과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는 포용의 크기가 곧 그 사람의 그릇 크기와 비례한다 믿기에 그의 의견을 존중은 하지만, 더 이상 존경까지는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재지 말자고 생각했다. 실로 나의 부재는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불안요소가 될 것이고(죽지 않고 등장하는 과대평가) 지금 현재 사랑하고 있는 이 남자와는 무관하게 앞으로를 결정하리라 다짐했다. 그도 나도 오늘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나, 내일도 그러하리라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가 가기 전 회사에 결정을 공유하여 나를 회사의 자산으로 잡을지, 손실로 잡아 비용으로 털어버려야 할지 알려드릴 셈이다.


3.

현재로서는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 사람이 갑자기 주말부부는 안 되겠단 이야기를 한다. 그 사람은 부산에서 일을 하게 될 사람이고, 나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랑이 시작되는 기로에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했기에 이미 이야기한 적 있는 주제였다. 만약 그 당시 그 사람이 주말부부는 안된다 답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포기할 수가 없다. 부산에서 살고 싶어 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예 전업주부로 살고 싶어 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서울에서 일을 계속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순 없다. 감히 내 인생이 그의 인생보다 가치 있다 속단할 순 없지만, 그의 인생이 나의 인생보다 중요할 순 없다.

너와 나 모두의 시간과 인생이 동등하게 소중하고, 중요하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에 행복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7월부터 9월까지 매달 시험을 봐야 할 것 같아. 목표한 점수가 나오면 계속 서울에 남아 유학 준비를 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부산에 내려가게 될 거야."


그의 미래에 어느새 나는 온데간데없다. 아니, 있었던 적도 없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언젠가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이미 귀를 막았다. 나는 입을 닫을 밖에.


최나경은 "단순한 것이 가장 와 닿는다"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도 긴말 없이 진심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와 닿는 것처럼, 멜로디도 단조로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같다고.


불행히도 나의 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하거나 단조롭기보단 어렵고 복잡하게 엉켜버리고 만다.

-끝.-

이유는 묻지 말아요. 꿈속에서 한 행동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전쟁에서도 그렇고요. 인생에서도 그렇지요. 사랑에서도 그렇고요.
-커트 보니 컷「멍청이의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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