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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l 19. 2017

27. 어지럼증.

새하얗던, 새까맣던, 눈앞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

회사를 나가지 않은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 6월 말, 느닷없이 얼굴을 보자며 연락해온 첫사랑에게 이직한 곳에 여전히 잘 다니고 있다는 답을 한지 꼭 일주일 만에 돌연 백수가 되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그 새벽에 정신줄 놓고 울며 불며 매달렸던 어린 나를 뒤쫓던 경비아저씨의 걱정 어린 눈초리. 가끔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여전히 마음 한켠이 아릿하다. 이따금씩 떠올려왔던 그 사람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단호히 거절하는 내 모습이 되려 낯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 것.

소중한 사람을 등한시한다면 잃게 된단 깨우침을 준 사람 역시 첫사랑이었다. 지금 나는 소중히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잃을 수 없는 이는 더 이상 네가 아니야.


1.

모든 일을 속 편한대로 생각해버리는 나는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다 막다른 길에 몰리고 나서야 애써 부정하던 마음속 한켠의 의혹을 가족들과 남자 친구에게 조심스레 꺼내보였다. 그게 일요일 밤이었다. 며칠 뒤 나는 곧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변명하자면, 나의 의혹이라는 게 영 미덥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눈치와 코치는 말아먹을 것도 없는 인간이므로. 터무니없다고 뒤로 밀쳐두었던 나의 의구심이 객관적으로도 꽤나 현실성 있는 가정이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 온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숨 쉬기가 힘이 들었다. 어지럼증에 몸을 똑바로 가눌 수가 없었다. 실은 진실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의 의혹이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내가 피폐해지고 말았단 점이 중요한 것이었음을.

그렇게 나는 당분간 쉬게 되었다. 평생 쉬고 싶지 않았음에 정말이지 쉬게 되는 날 같은 건 영영 없으리라 여겨왔는데.


언젠가 엄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란 말에 이제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여태는 계획대로 흘러온 순탄한 인생이었으므로. 왜 자식들은 부모의 말을 항상 뒤늦게 곱씹는 걸까. 내가 유독 우둔한 딸내미라 그런 건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도통 깨우칠 수 없다.


어릴 때는 한번 읽어서 마음에 드는 소설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던 건 시간이 넘쳐났기 때문일까, 아님 봐도 봐도 항시 새롭게 받아들이는 평균 이하의 기억력 때문일까. 뿐만 아니라 영 별로여서 끝까지 읽지 못했던 소설들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꼭 다시 읽어보곤 했다. 인쇄된 책 속의 글은 변함없지만 갈대 같은 나란 인간은 이 글들을 몇 개월, 아니 몇 년씩이나 책장에 썩힌 과거의 나를 도통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돌변하더라고. 최초의 후회는 너무나 충격적인데 9살의 내가 해리포터 시리즈(1~3: 마법사의 돌, 비밀의 방, 아즈카반의 죄수)를 졸업할 때까지 책장에 박아뒀던 사실은 정말이지 아직까지도 믿기 힘들다.


적어도 10번은 읽었을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지만 다시 펼치지 않은지 9년은 된듯하다. 고등학교부터 단짝인 두 남자가 등장하는데 굉장히 다른 성격의 소유자지만 둘 다 유부녀를 만난다는 점은 동일하다. 대학생이었던가, (평균 이하의 기억력) 어떤 일에도 자신만만했던 남성은 양다리인 사실을 들켜 결혼을 생각하던 또래 여자 친구에게는 실연을 당했고, 언제라도 자신이 부르면 달려오던 유부녀에게도 버림받았다. 그제서야 그 남자는 처음으로 인생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 같다 느꼈고, 이후로도 그러리라 예감하며 이야기가 끝났던 것 같다.


이제서야 나는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설계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자신만만함이 당치도 않은 오만이었음을 절감한다. 홀로 독고다이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에 그럴 수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어설픈) 깨달음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예상한다 한들 우둔한 머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상황까지 고려할 순 없고, 예기치 못한 만남과 인연은 예상을 벗어나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마련인 듯하다. 여태는 부모님의 온실 속에서 선연(善緣)만을 만나왔으나, 나이를 먹다 보면 악연(惡緣)도 있기 마련일 테지. 악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와의 인연이 악하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돌변할 나란 인간의 성향과, 앞으로도 몇 번이고 변모하여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 계획 덕에 생각대로는 살지 못할 미천한 인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인쇄된 활자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마주하게 될 그 모든 불확실한 미래에서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얼핏 완벽해 보이는 계획이란 놈팽이가 내 뒤통수를 계속해서 때려 갈길 것이라는 점과 그 어떤 순간에도 엄마와 동생이 내 편을 들어줄 것이란 점.


앞으로 뭐 하고(뭐 먹고) 살지 싶은데 희한하게도 불안감은 없다. 오늘은 오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한다. 오늘이 인생 마지막인 듯 날뛴다는 게 아니라 오늘 하루라는 시간을 성실히 쌓아 나가려 한다.

미래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미래였던 시간이 과거가 되어버린 후에는 절대 변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곤 하니까.


2.

언제였더라. 나를 향한 첫사랑의 마음이 식어가고 있을 즈음,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힘들어."

그 사람과의 이별 이후 만난 남자들에게는 부담 주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고, 의지하지 않기 위해 꽤나 힘썼음에도 번번이 힘들단 소리를 듣고 말았다. 또다시 짐짝 같이 버려지는 건 싫었다.


지금껏 그렇게 잘 해왔는데 무서워서, 불안해서, 기대 버리고 말았다. 소중히 지켜만 줘도 모자랄 판에,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내 짐이 무겁다고 징징거리는 과오를 범했다. 본인 짐도 버겁게 견디고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그는 그의 짐을 기꺼이 숨기고 나의 짐을 덜어주었다. 짐을 덜어준다는 건, 문제의 해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써야 하는 시간을 나에게 덜어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걱정을 제쳐두고 내 옆을 지켰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옆이다.


오빠는 오히려 기뻤다고 했다. 내가 본인에게 기대 주어 좋다고. 힘들다는 말은 없다.

적지 않은 여자들과 과거를 쌓아온 오빠지만, 내 발등에 떨어진 불 걱정에 정작 본인 발등에 떨어진 불에는 신경 못쓴 본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단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한 본인의 모습을 오빠는 이렇게 발견했다.


내가 겪은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만이 해결해줄 테지만, 서슴없이 내어준 오빠의 시간 덕에 안심이다.


불안감에 심장이 바르르 떨리는 느낌을 안고 집으로 들어와 엄마에게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확실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횡설수설하며 당치도 않게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대자 엄마는 단박에 답변을 제시한다.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어디 시간뿐이랴. 평생을 나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준 엄마다.


잡다한 걱정과 생각으로 갈피를 못 잡는 나에게 엄마가 입을 뗐다.

"나는 너를 지키는 일이고, 너는 너를 방어하는 일이다."

내가 속한 곳이 여기임을 새삼 다시 한번 실감하고, 이곳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깨닫는 순간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당장에 백수가 되었다.


들숨 날숨 쉬어가며 며칠 더 출근은 했지만 정신을 못 차리는 나에게 동생은 얼른 회사 그만두고 같이 공부나 하면 너무 좋겠다고 했다. 누군가 나의 안전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이렇게 또 배운다. 동생은 계속해서 내가 웃지 않을 수 없게 애를 쓰고 있다. 나는 이와 중에도 웃어대고,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동생이 존재함에 그저 두 손 모아 안도하고 감사할 수밖에.


혼자 있다 보면 생각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기도 하고, 가끔은 울고 싶어 진다. 아마도 전날 엄마가 팟캐스트에서 듣고 내 이야기인 것 같다며 해준 이야기 때문인가 보다 생각했다. 화를 안내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람이라면 논리적인 이유가 없더라도 분노라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감정이 해소되지 않으면 내재에 쌓여 위험하다고. 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괜스레 울화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조금 늦을 것 같다던 엄마는 내가 먹어보고 싶다 했던 닭강정을 사들고 금세 집으로 들어왔다. 하얀 물개 인형을 안고 세상 찌질하게 엎어져있던 나는 금세 감동받고, 기운이 나서 닭강정을 안주삼아 혼자 와인을 반 병이나 들이켰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동생은 택배박스에서 내 선물을 꺼내 든다. 퇴사 선물이다. 커플 카드 지갑. 동생은 핑크색, 나는 빨간색.

그리고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되었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여전히 행복하다.


3.

하지만, 역시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똑같은 결정(이직)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나는 안다. 영원히 이 회사를 다닐 수도 있겠다 생각해왔으나, 결과적으로는 백수로 전락했으니 후회가 없을 순 없다.

그럼에도 역시 인생이 정말이지 영화보다 영화 같단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자신만만하게 떵떵거리며 살아가던 나는, 정말 중요한 시기에 둘도 없이 훌륭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조금은 겸손해질 수 있었다. 정말 중요히 여겨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배웠고, 그로 인해 나란 인간의 가치도 그마만큼은 성장했다 믿고 싶다. 누구에게나 떵떵거릴 수 있는 성공을 원해왔으나, 조금은 더 훌륭한 인격체로 거듭나게 되기를 더 많이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물론 탐욕과 욕망을 버리지는 못했으나, 양자택일의 순간이 도래한다면 후자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해졌겠지. 성공의 기준이 돈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변했을 뿐이다.

 

엄마는 이번 기회를 통해 나의 선택이 틀리기도 한단 사실을 깨닫기를 충고했다. 내가 얻은 교훈은 엄마의 충언과 비슷한 듯 다른데, 후회가 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결정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후회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예의 우둔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 후회가 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쪽을 선택할 테지만, 더 큰 후회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은 잊지 않으려 한다.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인생을 선택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나 하나만 이 길이 옳다 믿으면 일사천리로 결정해버렸던 과거와는 달리, 소중한 사람들의 다양한 걱정에 진심으로 귀 기울인다면 조금은 더 뽈뽈해질 수 있지 않을까.


더는 함께 하지 않을 테지만, 회사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선량한'목표를 위해 올곧은 의지를 불태우는 조직이니 그리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이만 멀찍이 떨어져 빌어주려고 한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의 평온을 제게 허락하십시오.
대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꿔갈 수 있는 용기를 제게 허락하십시오.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시옵소서.
-에픽테토스

절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며 기도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길.

나와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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