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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Oct 07. 2017

29. 하고 싶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하루하루 평온하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바쁜 하루인데도 어쩐지 지루하다. 먹고 싶은 것들이 쌓여간다. 가보고 싶은 곳들도-더 늘어날 수 없을 만큼 이미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계속 잘도 늘어난다. 갖고 싶은 것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번져나갈 테니 생각을 않는다. 정말이다. 1년 뒤에 제대로 훑어보고 사야지 라고 생각하며 괜찮아 보이는 브랜드를 저장해두기는 하지만. 특정 상품을 찜해두진 않으니 나로서는 엄청난 절제다. 뭐.. 내 기준에선 그렇단 말이다.


지난 4.5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노는 관성이 생겨서 그런지 7일 중 적어도 하루는 놀아야만이 남은 6일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일주일의 유일했던 약속 하나가 급작스레 취소 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백화점 공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꽤나 절박하게 떠올랐던 내 모습이 어느 정도 납득은 간다. (절제는 어디로?) 창문이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 건물의 반짝 거리는 복도를 거닐으며 갖고 싶은 수많은 물건들을 슥 둘러보고-(절제는 여기에.)-아이스크림 하나라도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니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는 거 좋아하는 나는 자기소개서 쓰는 일이 성가시면서도 퍽 재미지다. 본투비 관종이라 내 이야기를 떠드는 일이 항시 즐거웁다. 어쩌다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로 인생을 채워나가기로 다짐했는지 싶었는데, 뭔가 비범하거나 특별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경험이 쌓이며 자연스레 인생이 그쪽으로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쌓아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기도 하고, 또 쌓인 시간들이 자랑스럽기도 해서 앞으로도 으스대고 살아가고 싶은 나는 가던 길 계속 갈 작정이다.


그래서 지금은 공부를 하고 있다. 학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건 아니니 공부라는 말은 조금 가당찮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법을 전문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로스쿨 입학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무언가를 학습하는 일은 재미가 없다기 보단 오히려 재미가 있는 편에 가깝다. 사랑해 마지않는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성장할 것이란 기대감이 따라붙어서 일 것이다. 그런데 공부의 끝에는 항상 시험이 있다.


시험은 싫었다. 지금도 싫다.


평가받는 게 싫은 이유는 자신이 없기 때문일까?

배우는 일은 항상 즐거운데도, 그에 대한 평가가 꺼려지는 건 사실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공부가 재미있는 이유가 사실은 딱 재미있을 만큼만 해서이진 않을까?

내 페이스대로 내가 준비된 시점에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소 느린 사람인데. 시험은 내 상황 따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응용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 같은 인간은 준비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평가는 가혹하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 그 과정은 어디서 평가받을 수 있지? 열심히 지새운 시간들은 누가 알아주지?


그녀의 말마따나 내 장점은 의지에 있으나 의지는 객관적으로, 계량적으로 평가될 수 없어 올곧은 의지의 소유자는 서글프다. 의지는 결과에 따라 간접적으로 평가받을 따름이다. 100의 의지가 100의 결과로 나타난다면야 문제없지만 나 같은 인간은 100의 의지로 50의 결과를 만들고, 똑똑이들은 50의 의지로 100의 결과를 만든다. 똑똑한 뇌 없이는 무용지물인 의지. 서글프지?


한자 2급을 따는 게 로스쿨 입학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들어 한자를 외우고 있다. 2,400자 정도를 외워야 하는데 외워도 외워도 홀라당 까먹어 버리는 우둔한 머리에 놀라고 만다. 그래도 암기는 자신 있었는데. 쭈글 해진 피부만큼 늙어버린 뇌가 원망스럽다. 자격증 하나 따겠다고 손에 감각이 사라질만큼 한자를 휘갈기다 열불이 난다. 손목 아파. 내 지문 멀쩡한가 싶어 쓰다듬어 본다.^^


의지, 성품, 인격과 같은 정성적인 것들의 가치는 확실히 평가받기도, 하기도 쉽지 않다. 정량적인 것, 이른바 기본을 갖추어야만 나의 정성적인 부분을 평가받을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를 수 있다. 억울하지만 정량적인 것의 평가 비교가 용이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어찌 보면 이성관계도 마찬가지다. 여자고 남자고 착하고 다정하면 된다는 사람들 많지만 그 밑에는 다양한 많은 기본들을 깔고 간다.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 나보다는 큰 키 등과 같은 객관적인 요소들은 당연히 언급할 필요도 없이 충족돼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러니까 나의 빛나는 의지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그만 투덜거리고 기본을 채워나가는 수밖에. 기본을 채워 정성적인 것들을 평가받을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빛날 테니.


머리가 좋으면 참 좋을 걸. 누구 닮아 머리가 나쁜지 오리무중이다. 다들 똑똑한데 말이야.

머리만 좋았어도 아쉬울거 하나 없는데. 엄마에게 투덜거려본다. 아이큐가 148인 똑똑이 엄마에게. 엄마는 네가 머리가 좋았으면 이렇게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될 순 없었을 거라 답한다. "네가 무슨 머리가 나쁘다고 난리냐." 같은 빈말 따윈 없다. ^^


똑똑이들이 부러운 밤이다.

그렇지만 다시 태어나도 조금은 모자랄지언정 여전히 나로 태어나고 싶은 까닭은 똑똑이들이 내가 가진 장점까지 모조리 가지고 있을 리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고지식한 나는, 약간은 멍청하지만 곧은 의지를 품은 내가 어지간히 좋다. 우습지만 나는 내가 고지식한 것마저 좋다. 


못할 일은 없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의지만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원했던 결과를 의지만으로 항상 달성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지.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인정하지 않으면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

로스쿨 입학을 위해 훈련하다 보니 더더욱 법 공부가 하고 싶어 지고 만다.

분명히 멋진 수단이 될 것이고, 또 폼 나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폼나는 수단을 얻을 자격, 혹은 능력이 나에게 없는 것이라면 아쉽지만 다른 수단을 찾아야겠지. 로스쿨에 못 들어가더라도 법 공부는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다만, 희망하는 모든 것이 될 순 없다.

또, 희망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도 없다.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순 있다. 조금은 덜 폼나는 길을 해쳐나가야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후회는 없을 테지.


내 분수와 그릇에 맞는 수단과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놓지 않고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법조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방향성을 잃지 말자. 한낱 수단 쟁취의 좌절에 낙담하여 목적까지 내팽개쳐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


내 동생은 나이 먹는 자신이 좋단다. 예전에는 계획한 일을 제때 못하고 미루는 일이 많았는데 항상 계획을 실천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자신이 좋다고 했다. 동생이 자신이 좋다니 참 좋다. 나도 동생이 참 좋아서.

난 오히려 조금 흐트러질 수 있게 된 내가 좋다.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받던 나는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일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여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었다. 조금은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졌다. 하루쯤 늦잠자도, 괜찮아.

어쩌면 그저 헤이해진 거겠지. 뭐, 그럼 어때. 천천히라도 꾸준히 앞으로 가기만 한다면 괜찮아.


백화점 공기를 정말이지 흡입할 필요가 있다며 헐떡이자 엄마가 마침 상품권이 있으니 나눠 쓰자고 한다. 구두 하나 사고 싶다.

남자 친구와 1년의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1주년을 기념하며 그는 편지와 상품권을 함께 줬다.

이쯤 되면 이건 구두를 꼭 사라는 하늘의 계시다.


절제는?

선물을 받았으면 쓰는 게 예의지.

절제는 잠시 뒤로 미룬다. 역시 그저 해이해진 것일 테지만, 뭐 어때.

새 구두를 또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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