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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Oct 29. 2017

30. 입을 좀 닫을 필요가 있다.

빠른 년생인 나는 아주 고생 고생하며 초등학교 1학년을 보냈다. 수학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혼자 남아서 별도로 공부해야 했고, 받아쓰기 시험은 아마 30점도 받아봤을 거다. 하긴 고생은 내가 아니라 엄마가 했다. 똑똑이 엄마는 부진한 첫딸이 어이가 없었고, 내 동생은 1년 빨리 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멍청한 첫딸로 마음고생 단단히 했던 엄마는 동생을 제 나이에 입학시켰다. 그 이후 유학을 가 한국에서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1년 빨리 대학을 마쳤고, 바로 입사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서든 막내였다. 입사 동기들은 차치하고, 후배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어린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사회생활에서 발을 빼고 보니 내 밑으로 언제 이렇게 많이들 태어났지? 새로 만나는 그 누구도 나보다 어리지 않은 사람이 없네. ^.^


그리하여 어린 친구들과 저녁을 한 끼 먹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후회가 막심했다. 쉬지 않고 나불거렸던 나의 주둥아리가 미웠다. 그리고 절감했다. 와 나 나이 진짜 배부르게 먹었나 보다. 신나게 나불거리느라 삼겹살은 거의 먹지도 않았거든. 나 언제부터 얘네한테 반말한 거지....?

양심상 계산은 내가 했다. 사회생활 좀 했다며 입을 다물지 않고 인생사를 지껄인 꼰대는 비굴하고 다급하게 다음부터는 엔빵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 *^.^*


왜 그랬을까?

그저 나란 사람이 나이 먹고 너네와 같이 학원 수업을 듣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나이만 먹은 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겠지. 찌질하다.

걔네는 네가 나이를 먹었건, 말았건, 일을 했건, 말았건, 관심이 전혀 없단다. 부끄러웠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다음날 아끼는 일제 복숭아 맛 젤리를 조금 나눠 주었다.


그렇게나 내 삶을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가 반문해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진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이름만 겨우 아는 그 어린 친구들에게 내 인생의 핵심 사건만을 족집게처럼 집어 설명한 내 모습은 결코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잖아. 되려 보여주기 위해 살았던 사람의 전형 아닌가?


sns를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소통하는데, 매일 자신의 공부 스케줄과, 필기구 같은 것들을 게시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형형색색의 필기구, 귀여운 필체로 꾸민 스케줄표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더라. 아마 이 사람은, 이런 게시글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sns를 강력한 동기부여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공부하게된다. 나약해지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강력한 sns 업로드 욕구.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져서 프로필 상태 메시지에 일찍 일어난 날은 O, 못 일어난 날은 X를 달기 시작했다. 반짝 효과를 보긴 봤다.

지난 2주간은 떨어지지 않는 코감기와 가래덕에 약을 먹고 있단 핑계로 큰 죄책감없이 늦게 일어나고 있지만..


과연 인생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시간을 보낸 인생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일까?

남들에게 보여줄 사건이 많아 자랑스레 떠벌리지만 실은 만족스럽지 않은 인생은?

남들에게 보이진 않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의 인생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위대한 인격체는 인정 욕구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반대해도 본인이 옳다고 믿는 일을 밀어붙이는 위인들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세계는 혁신되고, 발전하는 걸 테니까.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외치는 용기를 미덕이라 칭송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한 명의 "아니요."는 다수의 "예."에게 묻히기 십상이다. 현실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만족해야만 움직일 수 있다면 다수의 개인이 함께 일구어 나가는 사회라는 시스템은 굴러갈 수가 없을 테니. 그러니 현실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아니요."를 강경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은 위대 해지는 것이다.


다수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다수가 악할 때, 소수의 선한 사람은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은 아직 선(善)을 악(惡) 보다 높게 평가한다. 절대악이 선보다 우위를 점령하는 일이 적어도 공식적으로 타당하다는 인정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약한 성품을 지닌 나란 인격체의 나약해지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강력한 인정 욕구.


나 여태 이렇게 살았는데, 괜찮아?

"예."

그래서 나는 또 여태 이렇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가야겠단 의지를 일으켜 세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았다고 떠벌리는 게 즐거운 나는 내 삶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가 보다.

제발 좀 그 나불대는 입을 닫아주길 바란다. 훌륭한 인격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쉽게 감지되기 마련이니까.


진정 훌륭한 인간으로 거듭나기까지 주둥아리가 방정을 떠는 일이 분명 또 발생할 테지만,

삼겹살이랑 복숭아 젤리를 잊지 않고 준비해둘게. 좀 봐줘.


이렇게 잘 알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겐 잘도 떠벌떠벌 거리는 나지만 만났던 남자들에겐 뻑하면 입을 꾹 닫고 그들의 속을 터지게 했다.


두려웠던 것 같다. 나의 속상한 마음이 그들의 속을 상하게 할까봐.

언어로 구체화된 나의 속상한 마음이 그들을 실망시킬까봐.

그래서 떠나갈까봐. 그러나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떠나들 갔다. 내 속은 항상 상할일이 생겼고, 그들은 답답해서 떠났고, 그렇게 내 속은 속이 아니게 되는 악순환.


그래. 1년을 넘겼다고, 고비가 끝났을 거란 기대는 심하게 섣불렀다. 관계가 연장되면 고비의 시기도 연장되는 것임을.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까, 아님 내가 눈치가 빨라진 걸까? 어쩌면 그는 애초에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숨기는 척 하지만 실은 내가 알아차리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날 밤, 집 앞 공원을 걸으며 그는 우리가 맞지 않는 것 같단 생각을 했고, 순식간에 헤어짐을 계산했다. 그게 눈에 보였다. 내 눈에 그의 의식의 흐름이 보이는 게 너무 신기했다. 12시간 전에는 같이 있지 못해 안달 나 죽겠던 우리는 고작 반나절이 지나 영원히 서로를 볼 수 없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또 한 번 참 우스웠다. 빠르게 정리되는 그의 마음도, 그런 그를 보며 빠르게 정리할 준비를 하는 내 마음도.


기대는 정말이지 금물이다. 그 어떤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굉장히 오랜만에 1년의 고비를 함께 넘긴 관계에 감격하여 순간 해이해지고 말았나 보다. 내가 기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나 하나임을 깜빡할뻔했다.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좌절되거나 달성된다. 타인에게 거는 기대의 결과는 철저히 나의 제어 밖이다. 그리하여 실망은 필연적이고, 실망이 남기는 상처도 피할 수없다.


"기대는, 나 자신에게만."

엄마에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며 내 마음속에도 똑똑히 다시 한번 새겨 넣는다. 엄마의 입에선 벌써부터 그 누구에게도 아무 기대를 않는다니 불쌍하다는 탄식이.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건 연애경험뿐인 내가 얻은 유일한 저 교훈이 진리임을 엄마도 차마 부정하지 못한다.


마음을 곧 닫아버린다.

그러니까 마음을 닫는 방법은 참 쉽다. 입을 닫으면 그만이다. 입 밖을 떠나지 못하고 속에서 맴도는 섭섭한 마음은 칼을 간다. 상처받게 되면 언제라도 댕강 잘라버릴 수 있게.


요즘 들어 맛있는 게 너무 먹고 싶다.

그런데 맛있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건 존재치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존재치 않는 걸지도.


이제나 저제나, 입을 좀 닫아야 함이 분명한데 여기서도, 저기서도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도 이미 다 말해버렸거든. 말하지 않아 실패한 과거의 연애를 딛고, 같은 후회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간 칼이 너무 잘 갈려서 정말 이러다간 그를 내가 먼저 미워하게 될 것 같더라고.

나는 입을 열어, 닫히려던 마음을 다시 열어젖힌다. 그렇게 또 자존심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 본다.


그러나 기대는 않는다.

우리의 관계를 그가 자르던, 내가 자르던 끊어진다면, 그날 밤 그의 직관대로 우린 맞지 않는 것일 뿐일 테니까. 우리 둘 다 후회도 않을 거다.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떠벌리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길.

사랑으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길.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끝.-

청춘의 기습
-이병률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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