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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n 06. 2018

36.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사랑이었다고.

현충일 아침 일찍 별다방으로 왔다. 아마도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쓰는 마지막 시간이 될 것 같다. 어차피 데이트하려 했던 날이니, 오전 시간 정도는 할애해도 된다고 위안 삼으며. 일요일 오후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 일찍 오빠와 운동하고, 브런치를 먹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학원 옆 별다방에 앉아 블루베리 베이글과 콜드브루를 혼자 꾸역꾸역 넘기는 중이다.


오빠와 시작했을 때 즈음 생각이 많이 났다. 설레던 첫 만남, 택시에서 처음으로 손 잡던 날, 함께 이태원 재즈바에 갔던 날, 어쩌다 발길을 멈추게 된 대진항, 월정사, 집 앞 맥도날드에서 결혼하자고 이야기했던 날. 좋은 기억이 많다. 이 사람과 행복할 때의 시간들은 그 누구와의 시간보다 좋았다.


그래서 그런가. 미묘하게 다르다. 과거의 이별들과는.

전처럼 가슴에 바람구멍이 뚫려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거나, 잠을 못 잔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계속 명치 부근이 좀 아프다. 가슴이 메여서 좀 묵직하고 답답하다. 그뿐이다. 견딜만하다. 그 사람은 헤어질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내 시험이 끝나면 헤어지잔 말, 하려고 했다고. 언제부터 거짓이었을까, 이 사람의 사랑한다는 말은. 함께했던 6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중 얼마만큼을 거슬러 올라가야 거짓 사랑을 지워낼 수 있을까.


마음이 떠난 사람이었으니 마지막이 안 좋긴 했다. 무관심에 지친 나는 참아 넘길까, 서운하다고 말하면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망설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는 게 맞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정도는 말해도 된다 싶었다. 천만다행인 건, 일이 이렇게 사달이 났어도 후회가 안된다. 여지껏 마주해온 관계나 일의 끝에서 이렇게 후회나 미련이 전혀 안남아 본 적도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과거엔 항상, 그때 이러지 말걸, 조금만 더 참을 걸, 더 잘할 걸과 같은 잡념이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나는 당장에 그 사람들 집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이번엔 아쉬움이 없다. 실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였는지, 고등학생 때였는지 가물가물한데, 호주에 있을 때 김선아가 나왔던 <S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봤다. 김선아가 옛 연인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이었는데 끝날 즈음 완벽하게 복수에 성공하고 우는 장면이 있었다. "엄마, 다 성공하고 쟤 왜 울어?" "자기는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그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는 거지."


그땐 엄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에게 김선아의 복수는 그저 통쾌했고, 성공했으니 기뻐서 박장대소해야 할 일 같았다. 이제 와서 그때의 대화가 새삼 떠올라 눈물이 난다. 나 혼자 진심이었단 사실이 정말 눈물 콧물 뺄 일이라는 걸 이젠 알겠다. 며칠만 더 슬퍼해야지. 며칠 정도는 더 슬퍼해도 될 것 같다. 좋아했던 사람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일은 슬픈 게 당연하다. 울어도 된다. 카톡 몇 줄로 나와의 인연을 끝내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끝내면 평생 오빠를 안 좋게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사랑했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다 사라지고, 참느라 힘들었고, 외로웠던 기억만 또렷이 남을 것 같았다. 그건 싫다. 좋아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예쁘게 포장해서 한켠에 쌓아두고 싶다. 어느 쪽이냐면 이따금씩 꺼내보고 싶어 하는 쪽이지 절대 불태우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니다. 그래서 기어코 전화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래도 한때는 정말이지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다.


미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사라져 버리냐고 따져 묻고 싶다. 근데, 그런다고 사라진 마음이 다시 생기는 건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 말은 하지만, 정말 나를 사랑하던 그 사람과 헤어질 즈음의 그 사람은 거의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을 때면,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불렀고, 나도 그 사람을 불렀다. 그러고 나면 항상 낮게 웃던 그 사람의 그 웃음이 사라졌던 순간, 심장이 배 밑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만 떠올려도 그렇다. 그 순간 이후로 그 사람이 내 전화에 웃었던 순간은 딱 한번뿐이었다. 내 카톡 상태 메시지의 뜻마저 궁금해하던 그 사람은, 평생 안 바뀐 내 상태 메시지가 바뀌어도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이모티콘을 사서 애교 있게 이야기해도 알아채지 못했고, 번쩍번쩍하는 페디큐어를 발라도 몰랐다. 내게 힘든 일이 생겨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 연락이 귀찮아졌고,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도 점점 싫어지다가, 그러다가 그냥 내가 귀찮아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어느 정도는 믿었다. 본능적으로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

 

이 글을 그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근데, 애정 없이 읽기에 내 글은 좀 긴 편이다. 당장은 속 시원할 그 사람은 바쁜 사람이니 지나간 과거를 회상할 이유가 없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난 밤. 도대체 언제부터 헤어질 생각이었는지 궁금했고, 마지막 인사가 무색하게 12시간 만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오빤 최근이라고 답 했지만, 그 최근이 도대체 언젠지가 궁금한 거였는데...


혼자서 생각해본다. 오빠가 중국에 있을 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연락을 3주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한건 나였다. 오빤 한국에 오면 연락하겠다 했었는데, 못 참겠던 나는 전화해서 다시 잘해보자고 했다. 아마 그때도 그 사람은 그저 거절할 수 없어 잡혔던 것 같다. 내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연락은 영영 오지 않았을 것도 같다. 이 사람이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사람도 그렇게 믿었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고 믿을래.


행복하게 지냈으면 한다. 진심이다. 정말 좋았던 순간이 너무 많았으니까. 고맙다. 정말로 좋았다. 좋았던 것만 기억해야지.

-끝.-


이 글도, 너와의 시간도 이제 정말 끝이라 지금은 조금 많이 슬프다.

그래도 곧 괜찮아질 거란걸 아니까. 지금은, 맘껏 슬퍼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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