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hamalg Jan 27. 2019

43. 이젠 믿는다. 아니, 믿을 수 있다.

트루 러어브의 실존을.

이제서야 가족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을 부끄러운 마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꽤 많은 연인이 있었지만, 진정 사랑하게 될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여긴 적도 실은 크게 없다. 물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기초하여 지탱된 관계인 건 맞지만, 고작 그 정도에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좀 가당찮다는 생각이 본심.


사랑한단 말, 참 대수롭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자주 내뱉었고, 참 자주 들었고. 모두들 그냥저냥 사랑한단 말을 주고받으며 만나다, 혼기 차면 식 올리고, 아이를 기르고 그렇게. 숭고한 사랑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평범한 내 인생엔 없을 거라고. 사랑 때문에 죽고 못살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며 결혼하겠다고 용달차를 불러 짐을 빼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의 이야기에 실소를 날렸다. 코웃음을 쳤다. 한순간인데. 왜 저 난리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을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 그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숨쉬 듯할 수 있다. 사랑해 죽을 것 같은 표정. 너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실은 누구든 상관없었다. 옆에 있는 이가 누구든, 크게 상관없다. 다 비슷한걸. 다만 그들의 스펙을 볼 뿐이었다. 서류만 통과되면 곧장 사귈 수 있었다. 준수한 외모, 번듯한 직장, 여유로운 집안, 기타 사회성이 영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귀자는 거의 모든 이와 만났고, 사랑한다 했다.


언니의 편지와 선물. 누군가의 편지에 울어본 건 처음이다.

첫사랑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거짓 없이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는데, 상대는 친한 언니.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아쉽다는 노랫말이 넘치지만, 그날 밤 언니와 보낸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더뎠다. 함께 나눈 모든 대화가, 고민이, 웃음이 따뜻하다. 이 사람이 나의 20대를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내 자존감이 지금과 같진 않았을 것도 같다. 모든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사람. 내가 어떤 헛소리를 나불대도 허투루 듣는 일 없는 사람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 줄 사람. 언제나 내편인 사람이다.


나는 정말이지 언니의 존재 자체로 위로받는다.


나 역시 진심으로 언니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픈 맘이다. 언니에게 위로가 된다면, 도움이 된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면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이야 말로 떳떳하게 사랑이라 칭하는 거구나.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이마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리하여 다들 막 정신 차리고 스펙 따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진실된 사랑을 원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사실에 놀랍고, 기뻤다. 여태는 몰랐고, 그래서 누구든 개의치 않았고, 평생 사랑할 일 없으니 이쯤 좋아하면 사랑한단 말을 곧잘 지껄여도 괜찮다 여겼는데, 실은 나 역시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이제야 사랑에 빠진 척 연기 않고도 누군가의 여자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그 어떤 것도 양보한 적 없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희생했다고 경쟁하듯 난리 쳤지만 실은 없어도 별 타격 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내가 정말 아끼거나 좋아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연인을 위해 양보한 적 없었다. 위선적인 자신이 부끄럽긴 하나 죄책감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확신한다.


엽떡을 먹고야 말겠다며 귀국한 날, 그 사람이 파스타를 먹자 하면 즐거운 맘으로 기꺼이 먹는 것. 배고파 죽겠는데 콩 한쪽을 나눠먹지 않고 전부 다 내어주는 것. 일분도 놓치기 싫은 드라마를 놓쳐가며 시간을 내어주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다.


친동생, 엄마, 아빠뿐 아니라 피 안 섞인 언니도 사랑하게 된 나는, 이젠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려고.


사랑을, 해야겠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42. 또 한 번, 거저먹는 나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