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러어브의 실존을.
이제서야 가족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을 부끄러운 마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꽤 많은 연인이 있었지만, 진정 사랑하게 될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여긴 적도 실은 크게 없다. 물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기초하여 지탱된 관계인 건 맞지만, 고작 그 정도에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좀 가당찮다는 생각이 본심.
사랑한단 말, 참 대수롭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자주 내뱉었고, 참 자주 들었고. 모두들 그냥저냥 사랑한단 말을 주고받으며 만나다, 혼기 차면 식 올리고, 아이를 기르고 그렇게. 숭고한 사랑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평범한 내 인생엔 없을 거라고. 사랑 때문에 죽고 못살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며 결혼하겠다고 용달차를 불러 짐을 빼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의 이야기에 실소를 날렸다. 코웃음을 쳤다. 한순간인데. 왜 저 난리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을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 그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숨쉬 듯할 수 있다. 사랑해 죽을 것 같은 표정. 너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실은 누구든 상관없었다. 옆에 있는 이가 누구든, 크게 상관없다. 다 비슷한걸. 다만 그들의 스펙을 볼 뿐이었다. 서류만 통과되면 곧장 사귈 수 있었다. 준수한 외모, 번듯한 직장, 여유로운 집안, 기타 사회성이 영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귀자는 거의 모든 이와 만났고, 사랑한다 했다.
첫사랑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거짓 없이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는데, 상대는 친한 언니.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아쉽다는 노랫말이 넘치지만, 그날 밤 언니와 보낸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더뎠다. 함께 나눈 모든 대화가, 고민이, 웃음이 따뜻하다. 이 사람이 나의 20대를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내 자존감이 지금과 같진 않았을 것도 같다. 모든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사람. 내가 어떤 헛소리를 나불대도 허투루 듣는 일 없는 사람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 줄 사람. 언제나 내편인 사람이다.
나는 정말이지 언니의 존재 자체로 위로받는다.
나 역시 진심으로 언니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픈 맘이다. 언니에게 위로가 된다면, 도움이 된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면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이야 말로 떳떳하게 사랑이라 칭하는 거구나.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이마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리하여 다들 막 정신 차리고 스펙 따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진실된 사랑을 원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사실에 놀랍고, 기뻤다. 여태는 몰랐고, 그래서 누구든 개의치 않았고, 평생 사랑할 일 없으니 이쯤 좋아하면 사랑한단 말을 곧잘 지껄여도 괜찮다 여겼는데, 실은 나 역시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이제야 사랑에 빠진 척 연기 않고도 누군가의 여자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그 어떤 것도 양보한 적 없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희생했다고 경쟁하듯 난리 쳤지만 실은 없어도 별 타격 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내가 정말 아끼거나 좋아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연인을 위해 양보한 적 없었다. 위선적인 자신이 부끄럽긴 하나 죄책감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확신한다.
엽떡을 먹고야 말겠다며 귀국한 날, 그 사람이 파스타를 먹자 하면 즐거운 맘으로 기꺼이 먹는 것. 배고파 죽겠는데 콩 한쪽을 나눠먹지 않고 전부 다 내어주는 것. 일분도 놓치기 싫은 드라마를 놓쳐가며 시간을 내어주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다.
친동생, 엄마, 아빠뿐 아니라 피 안 섞인 언니도 사랑하게 된 나는, 이젠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려고.
사랑을, 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