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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by 안녕

잠이 들었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간이 되었다.


나는 <폭싹 속았수다> 6편을 보며 한참을 울다,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았다. 피곤할 법도 하지만 꾹 참기로 했다. 오롯이 주어진 1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어서다.


학교란 공간은 집으로 가는 순간까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나를 찾는 아이들, 내가 찾는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하루는 금방 흘러가고 만다. 집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태권도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딸아이와 함께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고 오늘 저녁 메뉴가 될 계란 한 판을 사 들고 집에 오면, 나는 지워지고 엄마만이 남는다.


피곤함을 이기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재생한다.

아주 어릴 적, 이모가 자주 듣던 노래, 귀에 익은 노래 <내 사랑 내 곁에>의 리메이크 버전을 듣는다. 노래의 잔잔한 분위기, 가사가 좋다. 어쩐지 슬퍼지는 부분이 꽤나 마음에 들어 한참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무엇을 할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고르고 고른다.

이성적으론 내일 3학년 1반과 함께 수업할 학습지를 준비해야 하지만, 감성적으론 내 안에 차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다. 결국, 먼저 일기를 쓰기로 한다. 학습지는, 계획을 조금 세워 두었으니 금방 마칠 수 있으므로 일단은 하루 종일 열심히 살아온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바빴지만 살만 했던 하루였다. 이제는 조금 더 가까워진 3학년 아이들과 편하게 수업할 수 있었고, 더워진 날씨에 맞게 시원한 옷을 입어 더위를 피할 수 있었으며, 좋아하는 커피도 무려 두 잔이나 편하게 마실 수 있었다. 몰아치던 일은 잠시 소강상태이며 나의 체력도 나쁘지 않았으니 오늘 만큼은 더할 나위 없었던 듯하다.


스스로 많이 다그치며 산다. 기준을 높이 설정하고 미치지 못하면 게으르다며 타박한다. 남들은 다 잘한다 해도 내 성에 차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고 괴롭힌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덕분에 학창 시절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지만 때문에 한 번도 편하게 쉬어본 적은 없다. 시간이 비면 빈 시간만큼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 체력은 약한 것이 욕심은 많아 고생을 달고 살았다. 마음고생. 몸 고생.


한가하면 불안했고 불안하면 뭔가를 벌였다. 감당할 수 있으면 다행이건만, 능력치를 넘어가면 후폭풍을 맞은 적도 많다. 대체로 평탄했으나 때로는 괴로웠던 삶이다. 썩 괜찮은 하루들이 모여, 지독히도 힘든 시간들을 덮어주었다. 이만하면 잘 지내고 있고, 잘 살아온 듯하다.


작은 것에 행복을 크게 느낀다. 주변의 아주 소소하고 미미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지하철 역 근처에 비어난 싱그러운 연둣빛 이파리에, 그리고 수업 끝나고 돌아온 내 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쪽지 한 통에. 자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면서도 살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힘들면 말 대신 글로 풀고, 책을 읽고, 홀로 생각하니 품이 덜 든다.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용케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문득문득 선생님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내가 뭐라고 나를 의지하며 힘을 얻고 삶의 방향을 찾아간다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렇다. 힘들어 쓰러질 것 같아도 아이들이 응원해 주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앞으로 나간다. 힘든 것도 모르고 지냈다. 지금 하라면 못할 일들을 마음을 담아 많이 했다.


아주 가끔 선생님 괜히 했단 생각이 든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갑자기 변해버린 표정 보면, 내가 뭐라고 누군가 앞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나 싶다. 애들 앞에서야 모든 걸 다 아는(것 같은) 선생님이지만 삶 속의 나는 매일 같이 번뇌하며 울먹이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 그 거리감을 이기지 못하는 날이면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좋아한다. 9년 전에 반지를 맞출 때에도 번쩍거리는 보석이 박히지 않은 것을 택했다. 매일 껼 수 있어 힘이 되는 편이 나았다. 9년 전에 쏙 맞던 반지가 맞지 않았을 때 절망했다. 세월은 그저 흘러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손가락 마디마디에 단단히도 자리 잡았다. 아무리 끼워봐도 들어가지 않아 속상함을 못 이겨 몇 년을 냅다 버려두고 살았다.


문득, 바람이 스치듯 생각나 당장에 비슷한 색깔의 목걸이 줄 하나를 사버렸다. 좋아했던 반지다. 껼 수 없다면 걸고 다니면 되지 싶어 목걸이 줄에 꿰니 멋들어진 펜던트 같다. 슬쩍 목에 걸어 늘어뜨리니 썩 괜찮다. 마음에 쏙 들어 요새 자주 하고 다닌다. 매일 만나는 수 백명의 학생 중 딱 한 녀석이 눈치채고 묻는다. 반지의 의미를. 그 녀석은 나랑 글도 쓰고 책도 냈던 녀석이라 각별하다. 몰래 알려주었다.


그럼, 결혼 반지지.


무슨 이야기를 이토록 두서없이 쓰나 싶은데 사실 내향적인 내가 혼자 있으면 하는 생각들이다.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 바쁘고 바쁘다. 힘도 들고 가끔은 지친다. 잊을까 아쉬워 기록하는데, 역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늦은 밤, 모두 잠든 시간에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제는 진짜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 준비하고 맞이하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므로.


글의 제목은 무엇이 좋을까, 고민이 시작된다. 제목을 지어야 마무리가 되는데 영 떠오르지가 않는다. 언제나 순간 번뜩이는 무언가가 찾아온다. 최고의 제목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은이 마음에 드니, 딱이다.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를 홀로 뱉어내고 홀로 들어주고 홀로 편안해지는 게 포인트 같아 '수다'라고 지어보았다. 지금 아무도 없는데 혼자 수다 떨고 있는 것 맞으니까.


평소에 멍하게 있는 날 보며 사람들이 물을 때가 있다.

혼자서 뭐 하세요? 라고.


혼자서 조용히 있을 때, 이렇게 논다. 머릿속으로 계속 수다 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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