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MBTI를 좋아합니다.

by 안녕

라테는 없었던 3학년 진로캠프가 있던 날이었다. 운 좋게도 1,2,3,5,6교시에 모둠 참관할 수 있게 되어 수업하는 모든 반을 임장 할 수 있었다. 다리가 퉁퉁 부어 너무 아프지만 5시간 동안 임장하며 아이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랄까. 뭐, 그런 날이었다.


녀석들이 1학년 때에는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의 80%를 내가 다 계획했었다. 강사 섭외, 공연 예약 등의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3학년이라니, 참. 세월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다양한 진로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흔한 (이제는 너무 지겨운) MBTI다. 나는 어쩐지 MBTI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5교시와 6교시를 너무나 기대했더랬다. 5교시는 3반, 6교시는 2반이었는데 아주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첫째, 3반과 2반에는 N보다 S 유형의 아이들이 많았다. N성향을 지닌 나의 수업을 S성향의 아이들은 조금 힘들어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수업 아이디어를 낼 때 뭔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구상하는 편이라, 가끔 뜬구름 잡는 느낌이 나곤 한다. 그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들의 대부분이 S다.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아이들과 직관으로 인식하는 나의 차이는, 생각보다 꽤 컸다는!


둘째, 나는 INFJ인데 나와 같은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 보통 한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INFP는 있어도 INFJ는 없었다. 이런 슬픈 일이... 나처럼 내향적이고 직관적이며 감성적이고 계획적인 인간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생각보다 T성향의 아이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순도 99% F라서 공감을 잘하고 오글거리는 말을 잘하는 편이다. 가끔 새벽에 감성 넘치면 내가 가르치는 학급 아이들에게 단체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작년부터 시작한 이벤트인데 애들이 좋아해서 올해도 1,2,3,4,5반 모두 적어주었다.)


그때마다 F성향이 많은 반은 뭔가 눈빛으로 감동받았음을 표현해 준다. 이를테면 '감동이에요. 샘 정말 막 눈물 날 것 같아요. 저도 샘 좋아요~~~~.' 하는 느낌. 반면에 T성향이 많은 반은 그 편지를 받고도 '음... 뭔가 감동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이런 편지를 받을 정도로 뭔가 잘했던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하는 느낌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이제는 그런 반응에 상처를 받을 경력은 아니나, 이유가 궁금했는데 MBTI를 보니 이해가 된다. 가장 아끼는 반 중 하나인데, 반응이 뜨뜨미지근하여(?) 내 표현이 너무 부족했나 싶었는데 그 아이들은 그런 감정을 소화하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다.


셋째, 유사 유형의 아이들끼리 모아 놓으면 평온함을 느낀다는 것. 요것은 6교시에 들어간 반에서 파악한 것인데 FP 아이들이 모인 모둠에서 은근히 시너지가 높았다. 서로 감정을 배려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고, 서로서로 알아서 조금씩 제 일을 하려고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재밌고 유쾌하게 과제를 해나가는 느낌? 또 NT 아이들이 모인 곳도 꽤 괜찮았다. N특유의 직관력과 T의 이성이 작용하여 재밌고 기발한 상상을 많이 했으며 결과물도 좋았다.


신기했던 것은 ISTP 아이들이었는데 (맞나?) 총 6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너무나 성실하게 제 나름대로 과제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와우! 모둠 활동인데! 같이 하는 활동인데! 각자 모여서 각자의 작품을 만들다니! 그 또한 신기했다. 대부분 성실하고, 대부분 꼼꼼한 아이들이라 결과물도 좋고 수행하는 내내 잡담 한 번 없었다. 신기방기.


MBTI는 할 때마다 약간씩 바뀌곤 한다. 나 역시 대학시절엔 ENFP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INFJ.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언제고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관찰 결과는 내게 아주 유의미했다. 어쩌면 지금 3학년 아이들에게 나의 과한 애정 표현은 조금 부담일 수 있겠다는 것과, 의외로 내향인이 많은 아이들의 에너지를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 더 얻은 수확은 담임할 때 유독 학급을 이끌기 힘든 해가 있었다. 나는 뭔가를 새롭게 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시큰둥하고 뭘 하든 관심이 없어 지치고 힘들었는데 그 역시 우리의 성향이 맞지 않아서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인간관계가 100% 맞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성향이 조금이라도 더 많으면 1년이 편한 것도 사실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닿았다. (참고로 난 여태까지 맡았던 반 중에서 가장 편하고 좋았던 반은 첫해, 둘째 해 학급이다. )


물론 맞다 안 맞다고 관계를 정리할 순 없다. 더더욱 나는 교사이니, 아이들의 성향을 파악해 그에 맞게 지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도 맞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통하는 느낌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반대 역시 엄청 힘들다.)


아무튼 다리 퉁퉁 부을 정도로 열심히 듣길 잘했다. 내일은 조금 더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신: 그래서 편지를 주었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던 반은.. 비밀이다. 다들 마음을 느껴도 겉으로 표현을 못할 뿐일 거다. 그걸 읽어내는 힘이 내게는 있다. 왜? 나는 NF니까!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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