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소소한 하루

by 안녕

절대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제 밤 11시인데 오늘도 새벽 2시까지는 일을 할 것 같아서 살짝 울적한 마음에, 그러니까 일 하기 싫으니까 자꾸 미루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는 것은 절 대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요새 수업 진도도 다 끝나고 할 게 없어서 아이들과 도서관엘 간다. 습한 날씨와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는 것은 역시 책이다. 자유롭게 책을 골라 읽으라고 제안하곤 나 역시 도서관을 훑어본다. 그러면서 정리한 요새 내가 사는 이야기, 풀어본다.


#1. 그놈의 일일일

약간 삐딱선 탄 것 맞다. 일이 끊이질 않는다. 대토론회 이후 마무리될 것 같은 일들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방학을 맞이할 수는 있는지, 아니 사실 방학 후에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오늘도 사실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데, 내 삶은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속상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래도 해야지. 뭐 별수 있나. 이왕 할 거면 빨리 해버리고 끝내는 편이 낫지. 아휴. 내 팔자.



#2. 그 좋은 글글글

제자 J(앞으로 글쓰기를 함께하는 제자를 J라 칭하겠다.)와 글을 쓴 지 대략 한 달 즈음되어 가는 것 같다. 내가 너무 바빠서 멈춘 글쓰기를 다시 이어하고 있는데 역시, 글을 쓰는 것은 너무 좋은 일 같다. 사람에 관해 생각하게 되고 정리하게 되고 글로 다듬게 되는 과정이 좋다. 2학년의 S도 나에게 "올해에도 책 써요. 선생님!" 하며 다가온다. S야. 너무너무 해보고 싶지만 그것까지 하면 선생님은 지금보다 살이 5kg 정도는 빠질 것 같아, 속으로 말하며 헤어졌다. 요즘 세상에 글 쓰고 책내고 싶어 하는 중학생이라니. 복 받은 거 맞지?



#3. 선생님께 게임을

S라는 남학생은 착한 아이다. 성실하고 올곧다. 감정표현이 살짝 서툴긴 하지만 그 아이의 그런 모습도 이젠 익숙하다. 어느 날 다가와 게임 이야기를 하더니 내게 제가 좋아하는 게임을 추천해 준다. 나는 게임을 정말 하나도 모르지만 S의 열정 어린 소개가 어쩐지 감동적이라 그만 아이패드에 게임을 깔고야 말았다. 정말 난 게임을 하나도 모르지만 이번 방학 때에는 제자가 알려준 게임을, 한 번 해보도록 한다. 스토리가 있는 게임인듯하여 기대 중이다. S는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오늘 열리는 아이템을 꼭 받으세요.", "목요일에 오픈되는 아이템은 진짜 좋은 거예요." 하며 알려준다. 게임 과외받는 중. 너 진짜 선생님 같다고 하니까 웃는다.

네. 선생님! 실력 향상으로 보답할게요. 걱정마세요. 제가 또 엄청 성실하거든요. ㅎㅎ



#4. 소년이 온다

한강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앞부분을 읽고 덮었다. 그이의 묘사가 힘들다. 멈추고 난 뒤 노벨문학상 소식을 들었다. 집에 그이의 책이 한가득이지만 손대지 않았다. 며칠 전의 일이다. 수업 진도 다 나가고 할 일 없이 아이들에게 노트북을 주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자 한 날이었다. D가 내게 슬며시 다가오더니 <소년이 온다>의 시점이 무어냐 묻는다. 작품 속 '사원'이 무슨 뜻이냐 묻는다. 솔직히 "선생님은 작가의 책이 힘들어 안 읽었다."라고 고백하자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나 혼자 그렇게 느꼈을 수 있으나....) 어쩐지 요즘 세상에 책을 읽는 아이가 기특하여 덜컥 약속을 했다. 우리 집에 <소년이 온다>가 있는데 한동안 안 읽었다, 하지만 네가 그 책을 읽어보고 있으니 나도 방학 때 읽고 우리 개학한 후에 같이 토론을 해보자, 하고.

그리고 오늘 수업 시간에 그 책을 가져가자 녀석은 반가워하며 다가온다. 아주 사소한 약속 하나에 울고 웃는, 소년이 곁에 있었다.



#5. 필름 카메라, 36장의 필름

J가 어느 날 필름 카메라를 샀다고 말했다. 90년대의 필름 카메라를 2020년에 보는 것이 신기하여 친한 선생님들과 함께 피사체가 되어 주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카메라 앞에서 뚝딱이는 인간인데 정말 J의 부탁이어서 렌즈 앞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다. 오늘도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는데, 참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신규시절, 아니 대학시절, 아니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 아니... 아무튼 돌아간 것 같았다. 사비를 써서 인화를 하는 게 미안해서 맛있는 것을 좀 사주겠다고 협상 아닌 협상을 하고 교무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는데 문득 필름을 다 쓰면 지 이이이 잉 하고 돌아가는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주 어린 시절 나 역시 자연 농원에서 사진을 찍다가 아버지가 "필름 다 썼네." 하는 말을 마치면 그 소리가 울리는 필름 카메라를 본 기억이 있다. 세대가 다름에도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36장에 담긴 우리 학교와 나의 동료와 나의 제자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6. 배우 박정민, 무제 대표 박정민, 파수꾼.

도서관에서 유영하듯 돌아다니다 발견한 책이 <쓸 만한 인간>이다. 박정민 배우의 에세이집인데 어쩌지? 마음에 쏙 든다.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글 속에 사람의 흔적이 남는 것을 좋아한다. <파수꾼>이라는 영화부터 주목했던 배우가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인정을 받음에 감사한데, 6월에 열린 국제 도서전에서 스치듯 봤다고 반갑기까지 하다. 일 다 마치면 그이의 책을 읽으며 잠시 몽글몽글함을 느껴 보리. 그런데, 배우가 글도 잘 쓰고, 책도 내고, 출판사 대표까지 하고, 엉? 그럼 나 같은 사람은 뭘 해 먹고 사느냔 말이다. 엉?



#7. 소년이 온다

편견에 사로잡힌 나는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책 없는 무례함을 겪기도 했지만 섬세한 나에게 무심한 그들의 말은 상처가 되어 꽂혔다. 나의 섬세함과 그들의 털털함은 맞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구한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요즘이다. 나는 요새 무수히 많은 소년들과 소통을 하고 있다. 별거 없는 국어 선생님에게 게임을 알려주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사진과 글로 소통하는 그 모든 존재는 한때 내가 너무나 두려워했던 소년들이다. 그네들과의 소통이 교사로서 내 자존감을 높이는 요즘이다. 일이 많아서 버티는 힘이 된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추신: 11시가 넘었다. 11시 20분.... 이제 일 시작해야지.. 해야지... ㅠ.ㅠ



사진 출처: Chat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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