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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도 부탁해

by 안녕

안녕. 유니.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정말 바빴던 엄마는, 네 생일에 편지글을 엮은 책을 선물하겠다는 엄청난 미션을 까맣게 잊고 말았어. 현생이 바빠 당장 코앞의 미래를 잊고 만 거지.


눈을 뜨니 오늘은 7월 19일이고, 네 생일은 대략 세 달 정도가 남았더라고. 충분하면 충분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부지런히 너를 향한 마음을 글로 적어 보려고 해.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말은 자꾸만 거칠어지던 요즘이야. 일이 많고 힘들었어. 체력 떨어졌고 그저 쉬고만 싶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특히 너의 잘못은 더더욱 아닌데 짜증의 화살은 너에게 돌아갔지. 정작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벌써 여름의 한가운데야.

미숙하고 어리석은 엄마와 다르게 넌, 엄마의 힘듦을 이해하고 오히려 등을 두드려 주기까지 하는 의젓하고 씩씩한 여덟 살이 되어 있었어. 여전히 엄마는... 그대로인데 말이야.


어느 순간엔가 훌쩍 커버린 너를 보며 문득 뿌듯하고 아주 자주 두려워져. 이제 앞으로 더 성장할 일만 남은 네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엄마가 부족한 엄마였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그게 조금은 무서워.


지질하고 어리석고 감정에 휘둘리는 엄마라고 기억하고 추억할까 봐.


문득 그게 두려워 요새는 네게 말하기 전에 수십 번을 생각하는데 여전히 어려워. 노력해 볼게. 정말.





무거운 얘기는 멈추고 즐거운 이야기를 이어갈게.

오늘은 엄마의 방학 첫날이었어. 못다 잔 잠을 자는 듯이 하루 종일 눈이 감기더라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데도 꾸벅꾸벅, 마리오 카트를 하는데도 꾸벅꾸벅.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잠에 미칠 것 같은 하루였지.


너는 이제 예전처럼 조르지 않고 가만히 나를 기다려 주더라고. 그렇게 정신을 차린 게 저녁 7시. 씻고 밥 먹고 우리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어. 난, 그 시간이 참 좋더라고.


엄마는 책을 참 좋아해. 어릴 적에도 좋아했고 지금도 무척 사랑하지. 사랑한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초등학교 3학년 때에 학교 행사에서 산 책을 읽고 또 읽었어. 종이가 다 닳아 없어질 것처럼 말이야. 조용한 방에서 혼자 책 읽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거든.


네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걸 닮았으면 했는데 아니야, 아닌 것 같아. 너는 책보다는 게임을 좋아하고 유튜브를 좋아해. 소워니놀이터를, 헤이지니를, 뚜아뚜지를.


내가 살던 세상과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접하는 매체 자체가 다르니(엄마 시절에 인터넷, 스마트폰이 어디 있어서겠어. 일요일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이 전부였던 세상이었는데.) 당연하다 싶고, 또 책이란 게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아쉽더라고. 공부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공부는 '할 놈은 다 한다' 주의여서, 네게 예체능 외의 사교육은 당분간 시킬 생각이 없는데도 책은 그렇게 욕심이 나더라.


마침 학교 숙제 중에 "책나무" 활동이 있어서 한 주에 다섯 권씩 읽고 독서 감상문을 적어야 하잖아. (그래봤자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고작 3줄을 주었지만. 너에게는 그게 또 30줄 보다 길게 느껴지겠지?) 그 숙제를 하면서 너에게 (억지로) 책을 읽히는데, 엄마는 (숙제를 위해서라도) 너와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아.


특히 오늘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거실에 놓인 커다란 탁자 위에 독서대 하나, 스탠드 하나 놓고 우리 둘은 책을 읽기 시작했어. 너는 책 읽기를 무척 싫어했지만 숙제는 해야 한다고 배웠으니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엄마는 원래 책을 좋아하고, 마침 읽고 있는 책이 있어 신나게 책을 읽기 시작했지.


사위는 조용하고 고요하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어. 누구도 잡담하지 않았고 그저 책 속에 빠져들었지.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40분 넘게 이어진 덕에 엄마는 <쓸 만한 인간>이라는 책을 거의 다 읽게 됐지.


너는, 그렇게 투덜댔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내게 말했어.


"엄마. 다락방 명탐정 2권도 빌려다 줘." 하고 말이야. (그런데 어쩌지. 엄마 방학 동안에는 학교 그림자도 안 밟을 건데.... ㅜ.ㅜ) 그러면서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아느냐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 방금 머릿속에 들어온 이야기를 엄마에게 알려주고 싶은 네 눈빛이 좋아 한참을 들어주었지.


숙제를 해야 해서 읽은 책이어도 좋아. 엄마는 네가 빠르게 넘어가는 영상보다는 한 장씩 천천히 넘어가는 책을 더 좋아했으면 좋겠어. 엄마의 오랜 꿈이 '작가'잖아. 글을 읽고 쓰면서 한 사람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어.


그래서 엄마는 오늘을 기억할 거야. 조용한 거실에서 사유하던 우리를. 그 장면을 말이야.


유니야. 우리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자. 그래서 먼 훗날 엄마와의 여덟 살을 추억할 때, 거실에서 함께 책을 읽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게 말이야. 유니 네가 커서, 이제 엄마랑 살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됐을 때. 문득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모든 것을 잠시 쉬고 싶은 그 순간에, 너를 일으켜줄 기억 중에 하나가,


오늘이 될 수 있게 말이야.


그러면 엄마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


사랑하고 또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하지 못할 만큼, 아끼고 사랑해.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보다도 더 행복하고,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어.

너는, 분명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러니, 오늘은 좋은 꿈 꾸길 바라. 꿈속에서 멋지게 유영하고 평화롭게 날아.


알았지?


엄마는 이제 맥주 한 잔 하고 들어갈게.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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