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하면 돼요 (2)

by 안녕

1998년. 이제 갓 열네 살이 된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를 사귀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잔뜩 긴장해 있다가도 끝나는 종이 치면 교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과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분주함 속에서 난, 내리 세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바쁘고 치열한 그 틈바구니 속에서 철저히 그림자처럼 숨어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붙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입을 움직여 ‘안녕’이라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의 은경이. 밝고 유쾌하며 공부도 꽤 잘하는 그 아이가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나 같은 애에게 다가와 준 그 마음이 고마워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었다.



관계의 추가 기울어 시작한 만남은 이상하게 흘렀다.



“너, 지영이랑 놀지 마.”



이유도 묻지 않았다.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 오랜 시간 만나 온 지영이를 단숨에 버렸다. 나, 이제 너랑 안 놀아. 그러니까 나 기다리지 마. 그 말이 다시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힐지도 모르고. 지영이의 마음속에서 선홍빛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잔인한 5월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난 2학기. 판은 뒤집어졌다. 그토록 다정했던 친구는 갑자기 차디찬 모습으로 돌변해 버렸다.



“은경아…?”



들렸을 목소리를 외면한 은경이는 나를 제치고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보란 듯이 어울렸다. 심장이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느낄 정도. 마음이 있다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믿을 정도로 괴로웠다. 학교를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혼자, 홀로. 그러니까 왕따 아닌 왕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사과를 하려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조롱이었다. 이유도 모를 관계의 종료는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혹시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답 없는 고민만 네 달을 하다가 보낸 편지를 제 친구들 앞에서 웃으며 읽던 은경이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이후, 은경이와 나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그것도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올라간, 그런 엔딩.



시리도록 추운, 12월이었다.





윤지의 ‘손절’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겪은 관계의 단절. 치유되지 않은 마음이 불뚝 튀어나와 윤지를 다그쳤다.



[윤지야, 그래도 그건 아니야. 사람 사이 관계가 그렇게 쉽게 종이 자르듯 툭, 잘리는 건 아닌 것 같아. 서로 대화하고 노력하면서 풀어 보면 어때?]



아무래도 내일 다시 만나 윤지의 마음을 돌려 봐야겠다, 이왕이면 수아랑 윤지가 만날 수 있게 자리 한 번 마련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둘 사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이니, 해결 방안도 쉽게 생각할 수 있을 터였다.



퇴근 시간에 한참 지난 지하철은 한산했다. 드문 드문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이어폰을 꽂았다. 덜컹덜컹, 거칠고도 투박하게 움직이는 지하철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눈을 감았다. 수십 년이 지나고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자꾸만 재생됐다. 엄지손톱에 툭, 튀어나온 살을 자꾸만 뜯어댔다. 선홍빛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 이이이 잉-



현주였다. 다급하게 쏟아지는 메시지는 녀석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디야? 용산에서 볼래? 나 할 얘기 정말 많음!]



마침 지하철은 한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한강은 낮의 그것과는 다른 공포스러움이 있었다. 꿀렁이는 강물을 바라볼 때면,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역 근처 호프집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재빠른 현주가 미리 잡아놓은 덕에 제법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맥주 한 잔에 하루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뭐 하느라 이 시간에 퇴근하냐?”

“상담.”

“심각한 거야?”



감자튀김에 케첩을 찍어 먹던 손놀림이 느려지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를 훑었다. 적당히 넘어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5년 전 그 일 이후, 현주는 부쩍 나를 걱정하는 횟수가 늘었다. 상담 직후라면 더더욱.



“그냥 친구들끼리 싸워서 손절하겠다고, 해서.”

“손절?”

“어. 3년 동안 친구였는데 그렇게 쉽게 끊어지겠나 싶어서. 걔들 중1 때부터 진짜 친했거든. 내가 다 알아. 다 봤기도 했고.”

“그게 뭐 어때서?”

“…어?”

“아니. 17년 동안 친구였다가도 하루아침에 돌아서는 세상에 3년 친구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까짓 거 안 맞으면 손절하는 거지 뭐.”

“그렇게 쉽게 얘기할 게 아니-.”

“아니 그렇잖아. 나 힘들게 하는 친군데 오래 만났다고 그거 유지해야 해? 그게 친구냐?”



술이 한 잔 들어간 현주는 거침이 없었다. 평소와 달랐다. 서슬 퍼런 얼굴을 하고선 따박따박, 모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집에 가고 싶어졌다. 용산역에서 내리지 말 걸. 상담했다고 하지 말 걸. 아니, 그냥 이미 집이라고 말해 버릴걸.



적당히 딴생각을 하며 현주의 말을 흘려보내고 있던 그때였다.

잔을 탁, 내려놓은 현주가 한 마디를 기어이 더 뱉어냈다.



“너도 솔직히, 그때 은경이 끊어냈어야 해. 널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랬어야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열네 살의 내가 듣지 못했던 말.

열네 살의 내가 하지 못했던 말.

그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해 가고 있었고, 호프집에선 익숙한 그 시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여기 맥주 500한 잔만 더 주세요, 하는 현주가 앞에 있고, 그제야, 진짜 하고 싶었던 말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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