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네 성격도 문제가 있어.”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그릇을 정리하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은경이도 잘한 것은 없지만 너도 분명히 문제가 있을 테니까 얼른 화해하고 예전처럼 잘 지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마침 은경이 부모님은 우리 가게의 단골이었다. 한 번 방문하면 통 크게 한 달치를 계산하고 가는 분들이었다. 은경이 부모님이 가게 들어오는 순간 환하게 변하는 엄마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날은 우리 집이 오랜만에 외식을 하는 날이었으니.
네가 적당히 수그리고 들어가면, 얼마나 좋니, 하며 그릇의 물기를 탈탈, 털어 건조대에 올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엄마는 어쩌면, 내 마음보다 당장의 월수입이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 마음도 저렇게 쉽게 탁탁 떨어져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저 물방울들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절도 있는 동작이 이어질 때마다 그릇에선 촤라락, 촤라락, 물기가 떨어져 나갔다. 개수대 밑으로 낙하하는 물방울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서글퍼졌다. 나는 저 물방울만큼도 개운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답답함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은경이의 교묘한 따돌림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암암리 느껴지던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평소 너무 조용해서 그림처럼 앉아있던 나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던 그녀는, 본인이 나의 담임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듯했다. 교무실엔 갓 우려낸 홍차 향이 가득했다. 담임의 손톱은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 매니큐어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그래, 요새 은경이랑 잘 지내더라? 은경이 같은 애 잘 사귀어둬. 지윤아. 중학교 친구 평생 간다.”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모습이 좋던데. 내가 너희 둘 다른 선생님들한테 칭찬하고 다녀. 너무 예쁘다고. 호호호.”
조금만 관심 있게 바라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누굴 위한 말인지 알 수 없는 온갖가지 이야기들은 교무실을 떠돌았다. 그녀가 한 마디씩 더할 때마다 작고 깊은 상처가 폐부를 찔렀다. 나는 애써 모든 이야기를 휘발시키고자 노력했다. 갈 길을 찾지 못한 말들이 기어이 내 귓가에 내리 꽂힐 때 즈음엔 이미 저녁 시간을 훌쩍 넘었을 때였다.
잘못은 나에게 있다.
관계는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중학교 친구가 진짜 우정이다.
뿌리 깊게 박힌 생각은 바뀔 줄을 몰랐다. 제대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열다섯이 되고, 열여섯이 되고, 서른이 되었다. 선생님이 되어서도 언제나 두려움을 품고 살았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두려움을 먹고 자란 어른의 나는, 나를 드러내기보다 상대에게 맞추기를 택했다. 손절은, 상상도 못 할 단어였다.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덕에 오랜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과 지지부진한 관계를 맺었다. 끝이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손절보다도 더 못하게 매듭을 지었다. 어딘가 뜨뜻미지근하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또 싫은 소리는 못하겠는 어중간한 마음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생채기를 냈다.
한 낮 동안 더위를 온몸으로 품던 하늘은 저녁 무렵에 세상 밖으로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맥주잔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혔다가 또르르, 하고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주 말이 맞았다. 손절, 끊어내기를 했어야 했다.
야. 그러는 거 아냐, 내가 뭘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길래? 넌 뭐 얼마나 잘났냐?
됐어, 내가 너 아니면 친구가 없냐? 끝이다 끝! 재수 없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끝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애처롭고, 가엾고, 슬픈 마음이 마음속 작은 틈을 타 흘러넘치고 있었다. 20년을 넘게 눌러온 감정이었다. 다시 뚜껑을 덮느냐, 아니면 환하게 열어 두느냐는 순전히 내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해주지 말라고.”
“…”
“친구니까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
“…”
“너나 나나 그게 되냐? 같은 반에 배정된 거뿐이잖아, 솔직히? 그 안에서 마음에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뭘 그렇게 애를 써가면서 유지를 해. 세상에 사람은 많고, 나랑 마음이 맞는 사람은 더 많아. 나 좋다는 사람들과 행복한 이야기만 하고 살기에도 세상이 짧다. 그런 걸 얘기를 해주란 말이야. 아, 내가 선생이 됐어야 하는데. 하여튼 고3 때 담임 놈 말 듣는 게 아니었어. 진짜.”
옛 생각에 울컥한 듯 맥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는 현주. 마른오징어를 집어 잘근잘근 씹으며 살짝 꼬인 혀로 잘도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같은 반 친구,
직장에서는 같은 부서 동료, 발령 동기,
결혼하면 또 어떤 의도치 않은 관계로 엮이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렸다.
손절. 표현은 거칠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내가 소중해. 그래서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과 더 오래 지낼 거야.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하는 너랑은 여기까지야.]
따지고 보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마음 알아줄 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윤지에게 상처를 줬다던, SNS에 윤지를 겨냥하며 소위 말하는 꼽을 주었다던 수아와 화해를 하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정작 내 삶은 늘 끌려다녔으면서.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아 불안하던 마음이 걷히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도 되는 것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더 나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위해.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모두 잠든 집엔 째깍째깍, 무심한 듯 흘러가는 초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책상 서랍에 앉아 편지지를 한 장 꺼냈다.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 오른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근육을 풀었다. 꼼꼼히 깎은 연필을 그러쥐었다.
사각사각.
[윤지에게-]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