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딸, 유니.
정말 오랜만에 쓰는 편지야. 그지? 더운 여름, 우리 딸 유니는 잘 보내고 있을까? 엄마는 너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며 덥고 힘들지만 뿌듯한 시간들로 채워가는 중이야.
오늘은 8월 16일.
어제 다녀온 용산 도파민 스테이션에서 받은 '도파민'이 싹 가시지 않은 오전은 우리 둘 다 너무 힘들었었어. 너는 네가 좋아하는 <흔한 남매>를, 나는 <까멜리아 싸롱>을 꺼내 읽기에 바빴지.
맞아, 우리는 요새 아침에 일어나면 (보통 6시 30분에서 7시) 소파에 앉아 말없이 책을 읽어. 30분이고 1시간이고 꿈속 세상에서 나와 현실을 맞이할 상태가 될 때까지 말이지.
오늘도 변함없이 너와 나는 각자를 돌볼 시간이 필요했지.
그리곤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덮어버리는 정오가 됐어. 이미 지난번에 도서관에서 빌려둔 책을 다 읽어버린 너와 나는 새로운 책이 필요하고 말았지. 힘든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도서관을 간 것도 그 이유에서였어.
9권의 책을 분홍색 캐리어에 담고 돌돌돌돌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우리는
걸어갔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은 우리의 아지트.
2층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까지 가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게 와서, 나는 그만 9권이 담긴 그 무시무시한 캐리어를 손으로 들고, 올라가 버리고 말아. 엄마, 얼른 나 따라와, 하며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네 뒤를 따라서.
미리 사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곁에 놓고 우리는 책을 빌리고 대출하고 읽기 시작했어.
<에그박사>, <엉덩이 탐정>, <흔한 남매>, <직업 이야기> 등 네가 빌린 모든 책은 너의 취향으로 가득했지. 글밥 많은 것보다는 그림이 가득한, 너무 진지한 것보다는 적당히 웃음이 있는.
책을 잔뜩 가져온 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어.
이제 가을에게 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가 왔는데도 여전히 심술부리듯 남아있는 늦여름의 더위는 생각보다 심했지. 통유리창으로 되어있던 도서관, 그리고 우리 자리는 연이어 햇빛이 쏟아졌어. 너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가면서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어.
나는, 그런 너를 보며 100페이지 정도 남은 소설을 읽다가 멈추다가 글을 쓰곤 했지.
그렇게 꼬박 두 시간이 지났어.
처음이었어. 그 도서관을 가서 두 시간 동안 오롯이 책을 읽은 경험 말이야.
어쩐지 뿌듯했지. 네가 그만큼 큰 것에.
그리고 네가 나만큼 책을 좋아하게 된 것에.
비록 그 두 시간 사이에 내가 빌리려 했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누군가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어하는 수 없이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단편집을 빌려야만 했지만, 난 아쉽지 않았어.
우리의 마음은 묘한 전우애로 가득 찼거든.
집에 돌아오는 길에 12권의 책을 가득 담은 캐리어를 끌며 생각했지.
앞으로도 너와 자주 도서관에 오고 싶다고 말이야.
이 마음, 이 기분은 도서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거라 다른 곳에선 결코 겪을 수 없을 거니까.
네 세상이 커지고
나의 세상이 채워지는 그 순간들 말이야.
유니야.
엄마가 어렸을 적, 우리 집 근처엔 도서관이 없었어.
엄마는 어린아이 걸음으로 꼬박 30분을 걸어야 나오는 도서관에 도착하면 이미 진이 다 빠져 무언가를 빌릴 마음조차 들지 않았지.
동네 서점은 어떻고. 외할머니는 책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어서
서점에 가려면 또 꼬박 40분을 혼자 걸어가야 했지. 그마저도 겁이 많았던 어린 엄마는, 할머니랑 외출을 하는 날에만 서점을 가곤 했어. 한 달에 몇 번 되지 않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꼭 읽고 싶던 만화책을 한 권, 두 권 사서 모았단다.
여름 방학이 되면
선풍기 하나를 켜 놓고
방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었어.
그 시절엔 집이 곧 도서관이었거든.
엄마가 좋아하는 이야기책은 책표지가 구겨질 때까지 읽었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았거든.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줄은 몰랐지.
꼬깃꼬짓 모아 온 용돈으로 책을 사는 그 기쁨이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줄은, 그래서 그 기억으로
힘든 시절을 버텨낼 줄은 몰랐지.
아마 네가 커갈수록
오늘 너와 내가 2시간 동안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은 오늘의 이야기는 흐릿해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 우리가 느낀 편안함, 행복, 그리고 안정감은 오래도록 남아 너에게 힘을 줄 거라 믿어.
언젠가 엄마가 네 곁에 없는 순간에도
네가 무엇이든 버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싹 하나 틔운 날이거든.
그러니까 유니야.
우리 내일도 도서관엘 가자.
이미 5권도 더 넘게 다 읽어버린 네 책을 담고
다시 돌돌돌돌, 바퀴를 굴려 가며 10분 거리의 그곳에 가자.
엄마는 준비가 돼있어.
너 도야?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