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유니에게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는
9월의 끝자락에서 엄마는, 실로 오랜만에
너에게 마음을 띄운다.
사랑하는 나의 유니.
요새 들어 문득문득, 너를 보면
언제 저렇게 커서 초등학생 티가 나나, 싶어.
아주 어릴 적엔 네가 언제 커서 제 할 일을
스스로 하나 싶었는데
훌쩍 커버린 지금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야.
오늘 오랜만에
휴대폰 사진첩을 뒤적였어.
클라우드 용량을 늘린 이후로
사진 정리를 절대 하지 않는 게으른 엄마의 사진첩엔
2018년부터 2025년까지
네 모습이 날것 그대로 담겨있더라.
신기한 건
그 사진만 보아도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날씨였는지, 그리고 너와 나는 어떤 감정이었는지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는 거야.
한참을 사진에 빠져 보다 보니 시간도
훌쩍 지나버린 것 있지?
엄마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만들어 두어야 하는 PPT는 뒷전으로 하고
잠시, 아주 잠시 너와의 추억 속으로 그야말로
퐁당, 빠져들고 말았단다.
기억날까? 2023년 4월.
네 티니핑 공연을 보러 경기도 일산까지 갔던 날.
돌아오는 길이 지루하다며 차 안에서 징징거리던 너.
나는 장난기가 많은 엄마라서
몰래몰래 네 표정을 찍어 두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네 얼굴에서
네 감정이 오롯이 드러나더라.
그해 5월.
급성 기관지염이 걱정되어 대학병원까지 널 데리고
갔던 날. 아주 작디작은 소아 응급실 침대에 누워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주삿바늘을 끼워 넣고 채혈하던
네 모습을, 찍어 두었더라.
원체 피 같은 건 보지도 못하는 나인데도
엄마라는 이유로, 네 손 꼭 잡고 토닥토닥해주었던 것이
생생해. 2023년엔 너도, 엄마도 자주, 많이 아팠어.
네가 아마 '수족구'에 걸렸던 날 같은데
법정 전염병이라서 너랑 나랑 같이 집에서 격리(?)
중이었던 것 같아.
집에서 뭐 할까, 하다가 같이 김밥을 만들기로 했는데
아픈데도 엄마랑 뭘 한다는 게 즐거웠는지 방방거리며 노는 모습이
남아있더라. 그저 작년에 있던 일 같은데 그게 벌써 2년 전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스크롤바를 내리다 내리다
작년 이맘때 사진까지 왔는데
2024년 9월 15일인가.
그때 네가 발목을 다치고
깁스를 하던 날 사진이 있더라고.
그땐 몰랐지. 네가 이듬해 1월까지 깁스를 할 줄은.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인 2024년 9월 22일에
내가 발가락 골절이 될 줄은.
그래서 우리 둘 다 깁스를 하며 걸어 다닐 줄은.
당시엔 너무 지긋지긋하게 싫었는데
그 또한 추억이 되어버렸어.
참, 신기해.
시간은 삶의 모든 흔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어떤 사진엔 우리 가족이
고궁을 배경으로 찍었더라고?
자세히 보니, 작년 봄 경복궁을 갔더라.
와우. 경복궁. 우리 거길 지하철을 타고 다녀온 거야.
경회루인가에서 네 모습 담아 주겠다고
연신 셔터를 누르던 것,
광화문 앞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여기 서 봐, 유니야. 엄마가 사진 찍어 줄 게,
했던 것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더라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하염없이 사진을 훑어봤어.
시간을 알뜰하게 쓰는 걸 좋아하는 엄마가
진짜 왠지 모르게 오늘은 그러고 싶더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 가족, 이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잘 남겨두면 좋겠다고.
예쁘고 멋지지 않으면 어때?
우리의 삶 대부분은
지질하고 엉성하고 부족하잖아.
어쩌면 한 번의 완벽함을 바라기보단
매일의 어설픔을 담아내는 게 더 의미 있잖아.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고
그 방향은 사람마다 다른 것일 테니까.
어제 도착한 셀카봉은
엄마를 뒤흔들었어.
영상은 더더욱 부끄러워하는 엄마이지만
우리 가족 브이로그는 한 번 찍어볼까, 하고.
그러면 훗날에
정말 먼 훗날에
엄마가 유니와 더 이상 함께 있지 못할 때에
우리의 지금을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앗. 너무 슬퍼지려나?
암튼, 오늘 엄마는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
아주 맑은 물이 가득 담긴 유리컵에
홍차 티백을 넣으면
아롱지며 홍차의 붉은색이 번져가는 것 같은 느낌이야.
학교에서 받은 따뜻한 관심이
조금씩 스며들어 이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나 봐.
그 행복한 마음을
우리 유니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나 봐.
유니야.
사랑하는, 나의 유니야.
심장을 태울 듯이 뜨겁게 뻗어가던 여름이
주춤하더니 제 자리를 내어 놓고 있어.
그 사이에 조금씩 가을이 스며들고 있지.
가을이 무르익어갈 그 어느 날까지,
슬몃슬몃 욕심내며 찬 바람 몰고 올
겨울이 가을의 자리를 빼앗기 전에
우리 많이 걸어 다니자.
너의 손을 꼭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자.
그래서 이 동네에, 곳곳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자.
퍼즐 맞추든 흔적을 맞추다 보면
우리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날 테니까.
내일 아침엔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날.
꼭 잡은 손 놓치지 않고
널 꼭 안아줄게.
엄마의 사랑을 가득 담을 수 있도록.
늦은 밤,
꿈속에서는
오늘 힘듦 다 잊고
누구보다 행복하길.
사랑을 담아
이천이십오 년 구월 이십이 일.
엄마가, 유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