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정도 학습지를 만들고 맥북을 켰어요. 작업용과 업무용을 구분해서 쓰는 중이거든요. 오늘은 좀 의미 있는, 기억할 만한 일이 있어서 큰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저 편하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1. 10장의 편지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마음
몇 주 전엔가 제자 놈에게 (아주 친하고 편한 녀석이라 '놈'이라고 칭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껄껄.) 편지를 주면서 추신으로 '답장은 10장 쓸 거 아니면 쓰지 말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더군요. 오늘 아침에 만나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진짜 10장을 쓴 편지봉투를 내미는 게 아닙니까. 정말 놀랐습니다. 편지 10장 쓰는 거 쉬운 거 아니거든요.
고맙다고 막 과장(?)해서 말하려는데 녀석이 쑥스러워할까 봐서 적당히 하고 멈췄어요. 원래 저란 사람 F라서 감정 표현, 풍부합니다. 그런데 녀석이 T라서 참았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읽는데 진짜 감동받았어요. 살면서 10장 빼곡히 적힌 답장받아보기 쉽지 않잖아요. 다짐했습니다. 제자 놈을 더욱더 괴롭혀야겠다고요. 흐흐. 졸업하기 전까지 추억도 많이 쌓고, 아쉽지 않게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그래야겠습니다. 벌써 졸업식에 울 것 같네요. ㅠ.ㅠ
2. 매너리즘, 권태기 그 어딘가.
에효. 삶이 요새 거칠거칠하다 했잖습니까. 움푹 파인 마음이 잘 복구가 안 됩니다. 몸도 아프고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 상태로 2주 정도 보내는 것 같습니다. 학교 일을 하다가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고요, 뭘 바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요. 사실 오늘 피피티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 안 했어요. 나란 인간... 미루고 싶지 않은데 요새는 자꾸 미루게 됩니다. 마음에 병이 생겼는지,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어요. 정말.
사실 지난주부터 제가 좀 바꾼 게 있습니다. 매일 새벽 2시까지 일하다가는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아서 원칙을 하나 세웠어요.
첫째, 학교 행정일은 절대 집에서 하지 않는다. 학교 공강 시간,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 해결한다.
둘, 집에서 시간이 생기면 브런치에 글을 쓰거나, 일기장에 손글씨로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래서 20권 돌파!)
셋, 수업 준비는 내가 소진되지 않게!
물론 원칙이 흔들리는 날도 있지만 대체로 할만합니다. 특히 첫 번째 원칙은 아주 중요한데요. 덕분에 제가 좀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아요. 브런치 글을 맥북으로 쓰는 이유도 같아요. 맥북에는 한글과 컴퓨터 프로그램 안 깔았어요. 일부러. 그것마저 깔면 이 맥북도 일하다가 끝날 것 같아서요. ㅎㅎ
덕분인지 요새 아주 조금 낫습니다.
3. 도대체 출판을 할 수는 있을까?
사실 제 요새 우울의 근원은 이것 때문입니다. 작년에 쓴 책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독립서점, 출판사 등을 알아보며 접선을 하고 있는데요. 쉽지가 않아요. 아예 독립출판물 입고를 안 받는 곳도 있고 (전화 건 곳은 모두 안 받아요.) 출판사에서는 계속 거절 메일이 옵니다. 자아가 센 편이 아니라 거절을 자꾸 들으니 마음이 작아져요. 나의 정체성은 '글 쓰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애매해진 것 같아 우울해지더라고요.
할 수 있을까요? 출판. 갑자기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눈앞에 하얀 안개가 가득한데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분명 어디론가는 가야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발을 디딜 수가 없어요. 그런 마음과 기분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포기는 안 할 거예요. 아마 제 성격상 끝까지 물고 늘어지긴 할 겁니다.
4. 담임을 할 때가 됐나 보다.
담임을 해보고 싶어 졌어요. 담임을 해야지만 더 내밀한 관계를 맺는 건 아니죠. 당연하죠. 그런데 어떤 소속감이란 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저는 2023, 2024, 2025년 내리 담임을 안 했어요. 작년엔 학년 부장을 했지만 부장과 담임은 다르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모두 잘 대해주지만 가끔 우리 반 아이들과의 추억을 쌓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요새 같은 때에는 반 아이들에게 편지도 써주고, 소소하게 이벤트도 해주면서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저는 아무리 예뻐라 해도, 교과 수업만 하기 때문에 약간의 거리감? 같은 게 있을 거거든요. 그래서 좀, 아쉽고 그렇네요.
며칠 전 2반에 들어가서 제 중학생, 고등학생 때 썰 풀어주는데 아이들 눈이 반짝반짝하는 거예요. 원래 그렇잖아요. 수업 시간에 공부 말고 다른 거 하면 더 집중되는 거. 그런 거. 근데 저도 재밌더라고요. 그런 소통, 너무 그리워요.
5. 수업, 계속 망하는 현장 속에서
2학기 수업은 정말 마음이 힘드네요. 매일 망하냐? 그건 아닌데요. 매일 조금씩 가라앉아요. 아. 교과서 제작팀 좀 원망해도 되나요? <허생전>, <봄은>, <껍데기는 가라>, <산에 언덕에>, 그리고 문장의 짜임.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애들 다 자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 같아요.
게임식으로 재밌게 풀면 되는데 제가 그걸 안 해 보려고 갖가지 별 짓을 하다가 소심해져서 요새는 강의하는데 강의할 때 픽픽 쓰러지는 애들 보면, 참. 마음이 헛헛해요. 중3이 이 정도는 이해하고 들어야지 (끽해야 20분의 강의) 싶다가도 내가 잘 가르쳤으면 애들이 잤겠나 싶어 자괴감도 들어요.
요새 그래요. <오늘 수업 뭐 하니?>에 쓰긴 쓸 건데, 마음이 편치는 않아요. 쨌든 하루 종일 망하는 건 아니니 그래도 썩 괜찮은 순간들로 버텨 보긴 합니다만, 하. 선생님이라는 게 매년 더 나아지는 게 없는 직업이라 힘드네요. 수업도, 아이들도, 상담도 한 해 한 해 힘들어요.
제자 놈은 저보고 정년을 채우라는데, 정년이라뇨. 그전에 빨리 제 길 찾아서 떠나렵니다. (이러고 정년 채울지도.)
6. 그래도 책, 글.
그럼에도 절 살리는 건 책과 글입니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재즈풍의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순간이 저를 숨 쉬게 하네요. 제 글을 읽어주는 독자님들의 라이킷도 저를 살리긴 합니다. (절대! 라이킷을 눌러달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래도 이곳에는 저를 지지해 주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분들이 더 많으니까요. 저도 홑문장, 겹문장 이야기 말고, 이런 사람 사는 이야기 하고 싶어요.
벌써 12시 20분을 향해 가는데요. 저는 책을 좀 더 읽다가 자렵니다.
20권째 읽고, 이제 21권을 향해 갑니다. 30권 채울 것 같아요.
기뻐서 읽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힐링이 되니 좋다 생각하고 읽을게요.
다들 늦은 밤, 평안하게 보내세요.
추신: 지피티는 브런치는 모바일 기반의 독자가 많으므로 호흡 길게 쓰면 많이 안 읽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뭐 오늘은 그냥 호흡 미친 듯이 길게 달려봅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계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 제 복 나눠드리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