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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의 한가운데

by 안녕

작년 추석엔 발가락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1학년 부장으로 절뚝거리며 강화도를, 체육대회를, 축제를 함께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심한 시간이 흘러 꼬박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연휴의 한가운데 서있다.

재량 휴업일까지 겹쳐 무려 10일이나 쉴 수 있는 기나긴 기간의 한가운데가 바로 오늘인 것이다.



늘어지는 기분이 싫어 부지런히 산다고 3일부터 이것저것 했는데 눈 깜짝할 새에 벌써 6일 밤이다. 글 좀 써볼까 싶어 노트북을 켜면, 해야 할 일 대신에 하고픈 일하다가 새벽 2시가 되어 버리기 일쑤.



이러다가 10월 12일 밤에 진짜 우울해지겠다 싶어 오늘부터는 조금씩 해야 하는 일을, 해나 가볼까 한다. 균형추를 맞출 수 있어야 오래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일전에 언급했던 3년 다이어리를 정말 성실히 쓰고 있다. 매일매일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매일매일이 다르게 흐르고 있음을 매 순간 깨닫는다. 어제와 다른 반찬을 먹고, 내일과 다른 일을 겪을 나의 삶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오늘은 오래된 책장에 꽂혀있던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세월의 흐름을 맞은 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시간의 깊이를 드러냈다.



낡아 빛바랜 종이의 질감과 소리가 좋아 한참을 넘기다, 읽어보마 하고 가져온 녀석들은 <자전거 여행>과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 마침 조예은 작가의 <치즈이야기>를 연휴 초반에 다 읽어 읽을 것이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문체와 내용이 썩 마음에 든 것이 가장 큰 이유.



지난여름에 읽다가 만 <시한부>도 목록에는 올라 있으나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건 미루고 미루다 다시 처음부터 읽을 것만 같다. 참, 워낙 추리와 방탈출을 좋아해서 <인생은 방탈출>이라는 책도 빌려와 읽고 있는데 영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정보 전달 위주의 책을 원래도 안 좋아하는데 이미 내가 거의 다 아는 내용이라 흥미가 뚝, 떨어진다.



<여름어 사전>과 <소설 보다 여름>, <소설 보다 가을>은 호흡이 짧아 연휴 내내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최근에 다 읽은 <치즈이야기>의 내용이 묵직하다 보니 새로운 책은 조금 가벼웠음 하는 마음에 골랐다. 단편 네 편이 실린 책은 얇고 가벼워 읽기에 최적화.



요새는 단편이 장편보다 좋다. 짧게 끊어지는 호흡의 글이 주는 울림이 꽤 마음에 든다. 마침 며칠 전에 제자 J와 함께 '사진 속 인물 및 장면'을 주제로 글을 써 공유를 했는데 스스로 너무 만족해서 며칠을 행복했다. 단편의 제목은 <달빛 아래 세자 저하>. 친한 동료들에게도 보내고, 나의 심야 친구 지피티, 클로드, 제미나이에게도 보내보니 다들 썩 괜찮단다.



특히 언제나 나의 멘털을 책임져 주는 '멘털케어선생님'이 나한테



"쌤 도대체 왜 교사하세요? ㅋㅋ"



라고 말한 게 큰 기쁨이 되었다. 글 쓰는 일을 해도 뭐 하나 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힘을 많이 얻었다. 행복했다. 글을 쓰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그리고 그걸 독자와 공유하며 서로 선한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래서 내가 새벽 2시에 잠을 자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쓰고, 기록을 하는 것이다.



휘발되는 하루하루를 붙잡아 기록하고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서.

마침 나의 소중한 동료가 <달빛 아래 세자 저하>의 뒷 이야기를 궁금해해서 조만간 이야기를 이어 써볼 작정이다. 괜찮다면 브런치에도 올려볼 예정이고.



과연, 여기에서의 반응은 어떨지 그 또한 궁금하다.



사랑하는 깊은 밤이 오고 있다.

좋아하는 잔나비의 노랫소리는 은은히 울려 퍼지고

고요한 서재엔 타닥타닥 부딪히는 키보드 소리만이 가득하다.



나는, 지금 고요의 한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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