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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커피

by 안녕

가을밤, 깊이 잠에 빠져있는 유니에게




안녕. 유니! 엄마야.

지금쯤 꿈속에서 친구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너에게

오늘도 짧고도 긴 마음을 띄워 본다.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린 빗방울이

사그라들고 있는 지금은 벌써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엄마는 최근 들어 좋아하게 된 '카더가든'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무한 재생해 놓고 네게 글을 쓰기로 한다.



등줄기에 땀이 훅훅 떨어지는 더위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을의 정취로 가득하다.



너와 나는 집에 가는 길 놀이터에 잠깐 들러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시소 근처를 한 번씩 기웃거리곤 해.

모래 놀이를 너무 싫어하는 나 때문에

선뜻 모래를 만지지는 못하고 그 근처를 어슬렁 거리는

너를 보며, 나는 가끔씩은 그 '모래 놀이' 허락해 줄까, 하는

마음도 든단다.



비밀 공간으로 나 몰래 달려가는 너의 뒷모습을 볼 때면

7년이라는 시간이 도대체 언제 어디로 흘러가 버렸는지,

마치 그건 눈 하나 깜짝하는 순간과 무엇이 다른지,

싶기도 해.



시간은 흘러 엄마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너는 점점 생기 있게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삶, 생에 대해 문득문득 생각한단다.



어제는 추석.

우리는 너의 할머니댁에 가서 하룻밤을 잤어.

사촌 하나 없는 적막한 그곳은

이제 여덟 살이 된 네가 놀기엔

너무나 무료한 곳.



한참을 혼자 놀던 네가 어쩐지 안쓰럽더라.

게임도 한두 시간 하면 질릴 텐데

너는 꼬박 하루를 게임만, 유튜브만 보았으니까.

날이라도 좋으면 놀이터라도 나가 비밀 퀴즈 풀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날씨가 그마저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설거지를 마치고 네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문득, 네게 미안해졌어.

나는 너에게 좋은 엄마일까,

네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있을까,

지금 네 마음은 어떨까,



갖가지 생각이 스쳐나간 끝에 결국

"우리 같이 그림 그릴까?"라는 말을 뱉어내는 것이

엄마의 최선이었단다.



지난 주말에 새로 산 사인펜은 선명한 색으로

제 자태를 뽐내었고

너와 나는 철 지난 티니핑을,

어느샌가 아빠의 상징이 되어버린 '초록티 아저씨'를 그리며

할머니에게 누가 더 잘 그렸느냐 따위를 묻곤 했지.

한바탕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지나간 자리 뒤로

너는 새로운 페이지, 새하얀 그곳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어.



동그란 뚜껑, 갈색 빛 물, 그리고 보라색 빨대.

맞아. 엄마가 하루에 네 잔도 마시는 커피, 커피였어.

아주 어릴 적부터 네 곁엔 내가 있고 내 곁엔 커피가 있었지.

고소하며 진한 향이 좋아 커피잔 근처를 얼쩡이다가도

한 방울이라도 혀에 닿으면

쓰다며 울먹이던 네가

엄마의 커피를 그리고 있더라.



체력이 워낙 약했어.

강박이 심했고

불안이 높았어.

아주 어린 네가 나의 부주의함으로

큰일이 생길까 봐 늘 전전긍긍했어.

커피는 각성제이지만

그마저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더라고.

버티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커피는 이제 떼려야 뗄 수없어졌지.



오죽하면 주말 아침은 밥대신 커피.

드립 커피를 내리면 주변에 퍼지는 커피 향으로

엄마의 존재를 깨닫는 너니까, 할 말 다했지.



생존으로서의 커피였지만

네가 커 갈수록 함께할 수 있는,

나눔의 그것이 되길 바라.



엄마와 함께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커피를 시켜 놓고

카페 사장님이 '저기요. 이제 마감 시간인데요.' 할 때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나질 않기를 바라.



주말 아침, 대학 과제를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너를 위해

맛있는 토스트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준비하는 기쁨이 내게 있기를 바라.



헤어진 남자친구를 그리며

펑펑 울던 네게

다디단 바닐라빈 시럽을 넣은

아이스 라테를 같이 마시며

'사실은 네가 아까웠어. 세상에 괜찮은 남자는 더 많아.'

라고 토닥이는 미래가 오길, 바라.



한 잔의 커피 그림이

내게 불러온 이 엄청난 서사가

결국은 실제로 일어나길, 바라.



그러면 그때의 나는

네가 그린 커피 그림을 조심스레 네게 보여줄래.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손으로 꾹 꾹 눌러 그린

네 그림 덕분이라고.



덕분에 꿈꾸게 되었으니

그 커피는 꿈꾸는 커피 아니겠느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와 나누는

그 순간을 위해



오늘도, 너를 어제보다 더 사랑할게.

아끼고 안아주고

배려할게.

가끔은 올라오는 감정에 짜증 날 것 같으면

그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게.



그러니 유니야.

우리 먼 훗날의 우리를 위해

매 순간 서로를 더 사랑하자.



꿈꾸는 커피가

곁에 올 수 있게.





2025년 10월 7일 (화) 새벽 1시

식어버린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사랑하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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