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이야기
이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주 어릴 적 기억이 있다. 엄마와 함께 어딘가로 놀러 갔다가 키다리 아저씨를 본 기억이다. 그는 나 같은 꼬마는 익숙하다는 듯 손에 들린 길쭉한 풍선을 후 불어 금세 멋진 하늘색 칼 하나를 만들어 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떻게 죽마 위에서 풍선도 불고 칼까지 만드는지 참 궁금했다. 사실은 어떻게 서 있는지조차 궁금했다. 내려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살짝 떨리는 높이에 균형까지 잡는다니.
그런데 절망적 이게도 내가 지금 그 위에 서 있다.
우선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스스로 자존심을 채우는 건 아니지만 자존심은 높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에게 너는 할 수 있다며 바람을 불어넣어 주신 원장 선생님 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나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쉽게 자존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신뢰하게 되었다. 말 자체는 좋게 들린다. 그렇지만 나를 신뢰한다는 것은 남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와 같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 공동체, 그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갈수록 능력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분업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계속 짐을 들고 있다 보면 죽마를 아무리 많이 타본 사람이라도 넘어질 것이다. 그래서 짐을 덜어줄 죽마고우들이 필요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위에서 말한 것들을 전혀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부회장과는 절친하지만, 걔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특히 맞춤법) 하는 모양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선거 토론 방송 때 돌상처럼 얼어붙은 모습이 계속 오버랩된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한다. 또 학생회 일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홍보 포스터를 붙여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부원들이 하는 것을 보면 테이프도 덜렁덜렁한 게 심지어 전에 있던 포스터도 떼오지 않는 것이 영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한다. 어느 날은 교감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학교 소개 PPT를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누구 맡길만한 애가 없을까 생각해 보니 전부 마땅치 않아서 그냥 내가 한다. 정말 이럴 때이면 죽마고우가 나타나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다.
나도 분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실천하고 싶지만, 마음이 나서주지 않는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손에 뭔가 잡혀있지 않으면, 일이 없으면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 같은 마인드도 한몫한다. 이런 연유에 할 것이 많다. 시간이 없을 때도 잦다. 부르는 사람은 많은데 한 곳만 가야 할 때 거절해야 하는 마음은 참 슬프다. 내가 조금 내려놓는다면 다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저번 금요일이 그러했다. 금요일에 원래 학생회 회의가 있었으나 그 주 화요일부터 잡혀있던 접선에 회의를 못 나갈 것 같다고 하고 국어 선생님과 만났다.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지만 많은 얘기를 했다. 국어 선생님도 나와 같은 성격이라고 본인도 계속 일을 어디서 끌어온다고 말하셨다. 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지만, 결론은 같으니 그냥 끄덕했다. 그리고 신세 한탄 할 곳도 없어서 그냥 고민거리 내지는 생각들을 말했다. 그렇게 쏟아내다 보니 생각이 좀 정리되었다. 쌓여있는 일에 감기까지 겹쳐 심신이 심히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주변 사람들 덕분에 버텼던 것 같다. 아프다고 하면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에 위안을 느끼고 이런 주변 사람들의 감사에 힘입어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분업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일 뿐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것도 분업이 아닐까 한다. 마음의 짐도 일종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선 30분간 이야기를 들어주신 국어 선생님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 배를 탄, 같은 죽마를 탄 내 죽마고우들에게도 일과 함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제 높은 죽마에서 내려올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