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우리가 음미할 틈을 안 준다.
행복은 앞통수,
불행은 꼭 뒤통수고,
엄마가 놀지 말라는 친구는
다, 이유가 있다.
- <폭싹 속았수다> 중-
평온했던 날이 무색하게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엄마 목이 아파."
"목이 따끔해."
하며 환타를 홀짝이던 아이는
밤 11시부터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벽 2시, 38.9도로 치솟은 아이의 몸은
쉬이 식을 줄을 몰랐다.
불현듯 4년 전, 2월의 어느 날이 스쳤다.
그날은 눈사람을 만들고 들어온 날.
재우는데 등허리가 뜨뜻하여
체온을 재진 39.4도가 한 번에 찍힌 날.
아이의 열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삶을 뒤 흔드는 것임을
깊이 깨달은 날.
겁이 났다. 오늘도, 어쩌면 이러다,
40도 가까이 가면 어떻게 하지.
초보 엄마의 그것과 같은 불안이 스치자
일은 나중이었다.
일단은 엄마로서의 역할이 중했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해 아이가 오래 아팠다.
병원까지 가는 길에 걷지 못하겠다며
울먹이던 모습은 아직도 마음 깊이 남아있다.
일과 아이 중에서 제1은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놈의 일중독자 엄마는 쉬이 놓지를 못했다.
내내 미안할 따름이다.
독감 확진을 받기까지 마음이 참 고됐다.
손에 든 '타미플루'를 먹여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해열제를 교차 복용 하고 나서야,
이튿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아이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평온한 새벽이 찾아왔다.
혹시나 열이 오를까 긴장하며
어제를 보냈다.
1시간에 한 번씩 오락가락하는 체온을 보며
늘, 나는 내가 대신 아프기를 바란다.
나라면 마스크를 쓰고 꾹 참고
어떻게든 버틸 거야, 그러니 제발 내가 아프게 해 줘, 하며
기도한다.
필요할 때만 찾는 나란 인간의 기도는 약발이 없어
늘 닿지 않는 간절함이지만
어제도 그렇게 나는 종일 빌었다.
아주 어릴 적,
7살 즈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가 운영하던 작은 금은방엔
가겟방이 딸려있었다.
그 방 문턱에 앉아있던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나의 엄마는
나를 안아 등을 두드려 주고 있다.
기관지가 약하게 태어난 나는
숨이 거의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
엄마는 내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는 아이가 아플 때에면
그 시절의 엄마와 내가 생각이 난다.
기껏해야 삼십 대 초반이었을 우리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토닥였을까.
그 마음이 그려질 듯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새벽녘 잠꼬대를 하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딸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줄 뿐이다.
소리 없이 찾아온 불행이
잦아들고 있다.
나는 이 찰나가 소중하여
기록을 남긴다.
어느 날, 언젠가
내가 세상에 없을 때에도
이 글은 남아 오늘을 기억해 주길.
아직은 서툰 엄마가
딸아이 곁에서 고군분투한
그 2일을 잊지 않아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