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지나간 자리

by 안녕

눈이 내렸다.


이리저리 춤을 추듯

눈이 한가득 내렸다.


눈이 덮인 세상은

그림처럼 조용했고

뽀드득, 발걸음이 미안할 정도로 고요했으며

사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물감을 짜 놓은 것만 같았다.


눈이 그쳤다.


한참을 퍼부어 대던 하늘엔

눈송이 대신 마알간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눈이 지나간 자리에

보이지 않던 삶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꼭 같은 아침 6시 반, 1분이라도 늦을까

서둘러 배달 차를 움직이는 요구르트 아줌마의 바퀴 자국


이 버스 놓치면 안 되는 청년의 다급한 운동화 자국


미처 치우지 못한 눈덩이에 발을 헛디딜까 걱정하는

경비아저씨의 성긴 빗자루질 자욱


그리고 태어나 처음 눈을 보는

이제야 막, 세상에 온 힘을 다해 발을 디딘

아기의 발자국


꾸욱

눌려 박혀 있는 발자국에


저마다의 삶이

저마다의 고민이

저마다의 기쁨이

묻어있는 줄 몰랐다.


그렇게 모두가

제 몫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바쁘고 힘들고 기쁘고 곤하게

보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실은 우리 모두 다 같은

그럭저럭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평안을 바라고

있다는 걸을


몰랐다.



어떤 장면은 애써 보려고 할 때에는 제 모습을 숨기다가 불시에 나타나곤 하는 것 같다. 오늘 일이 꼭 그랬다.


엊그제 쌓인 눈이 사라지지 않은(사라지지 못한) 출근길은 퍽 불편했다. 질퍽이다가도 미끌거리는 통에 중심을 잡기 위해선 온 힘을 집중해야 할 판이었다.


눈이 내려 좋은 나이는 이미 훌쩍 넘긴 나는 그저 투덜대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코 발 밑을 내려다보는데 지저분하게 녹고 얼어붙은 눈 위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내가 밟은 자국 밑엔 나보다 더 이른 사람의 것이, 그것의 밑엔 모두 잠든 새벽녘 누군가의 것이, 그것의 밑에 밑엔 어제, 아니 그제 이곳을 지나간 누군가의 것이.


이 작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궤적이 자국으로 남아 보이니 참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겹겹이 쌓인 발자국은 분주했고, 신났고, 즐겁다가도, 힘들어 보였다.


흔적을 남긴 그들이 그러했듯이 실은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새삼 마음이 따듯해졌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외로운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뻔한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새삼 느낀 날이었다.



photo by laura ada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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